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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이슬람에 독자적 접근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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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달 초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담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 재건을 위해 이라크군을 훈련시켜줄 것을 유럽에 요청했다. 동맹국들은 마지못해 또는 부분적으로 승낙했고, 프랑스 등은 반대했다.

반대의 이유는 견해차다. 미국과 유럽이 확대된 나토 동맹의 미래, 이라크의 미래, 유럽연합(EU)의 외교정책과 전략적 입장 등을 둘러싸고 의견이 크게 다른 것이다. EU는 나토에 잠재적으로 라이벌인 동시에 전략적 보완재적인 성격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부시 행정부 정책에 대한 적대감도 작용했다.

최근 중동에 대한 미국과 유럽의 접근에 큰 차이가 있다. 미국 정책의 핵심은 중동에 있는 '악의 축' 국가들을 미국이 지원하는 이슬람 민주주의로 대체하는 것이다.

유럽은 미국의 이상을 높이 평가하지만 실행 가능성과 적합성, 방법 등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는다. 유럽이 반대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이며 이상적인 자신감으로 합리화된 파괴적인 행동이다. 유럽은 특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에서 샤론 정부에 사실상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미국의 정책에 의구심을 갖는다.

미국의 이런 입장은 나토 회원국에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 몇달간 미국은 나토를 이라크에 참여시키는 것을 외교의 우선순위로 삼았다. 미국은 이라크를 '민주화시키고 테러리즘을 물리칠 것'을 나토에 요청했다.

당초 워싱턴은 나토 전투병들이 이라크에 들어가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났다. 지금 워싱턴은 (그렇게 되지 않겠지만) 나토가 이라크 임시정부의 치안유지군 훈련을 담당하길 원한다. 워싱턴은 이라크를 일방적으로 침략해 점령했다는 정치적 부담과 최근 이라크에서의 혼란에 대해 단독 책임을 갖고 있다. 이를 떨쳐버리기에 충분할 정도의 나토 참여를 원하는 것이다.

일년 전 미국은 '연합군'의 형식을 빌려 국제사회의 지지를 이끌어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러나 영국.폴란드.이탈리아.스페인 등 나토의 일부 회원국을 제외하고는 미국이 주도한 이라크 공격에 전폭적으로 호응하지 않았다. 영국.스페인.이탈리아.포르투갈.덴마크.네덜란드 등은 미국에 대한 충성심 정도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스페인은 이미 이라크에서 철군했다. 나토의 이름으로 새로 개입해 자국의 위험부담을 두배로 늘리고 싶어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오늘날 이라크의 혼란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워싱턴도 패닉 상황이다. 워싱턴은 내년 1월 예정된 이라크에서의 선거 이후 어디로 갈지 모르는 혼돈의 정국에서 어려움을 같이할 동지를 찾고 싶어한다. 이라크 임시정부가 그때까지 선거를 치를 수 있을 정도로 존속한다면 말이다.

이라크 이외에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이슬람과 개도국들의 부시 행정부에 대한 견해다. 만일 나토가 미국의 요청을 수용할 경우 갈등의 양상은 '서양 대 나머지'의 구도로 굳히는 것이다. 이것은 큰 재앙이 될 것이다.

미국은 스스로를 위기에서 구출해야 한다. 새 미국 행정부가 그렇게 할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유럽인은 이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당 존 케리 후보에 대한 신뢰는 잘못된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다. 유럽은 스스로에게, 이슬람 세계에게, 그들의 동맹인 미국을 위해 의무를 지고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 이슬람 사람들이 보기에 사회와 사회 간의, 국민과 국민 간의 전쟁으로 치닫게 되지 않도록 해야할 의무 말이다.

이를 위해 유럽인들은 이라크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과 관련한 미국의 일방적 정책을 지지하지 않아야 한다. 또 이슬람 세계에 대해 독자적인 접근도 필요하다. 서양의 문명이 한덩어리가 아니라 복합적이며 개방돼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윌리엄 파프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칼럼니스트
정리=박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