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기 왕위전 본선 리그' 바둑판 위의 심리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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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기 왕위전 본선 리그
[제6보 (77~91)]
黑.안조영 8단 白.이세돌 9단

후지쓰배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박영훈9단은 네살 때까지 말을 못했으니 일종의 지진아(?)였다고 봐야 한다. 공책을 사다줘도 아버지 어머니 같은 한글은 쓰지 않았다. 대신 박영훈은 1에서 1000까지 숫자만 쓰고 또 썼다고 한다. 수(數)에 본능적으로 강한 끌림을 느꼈던 박영훈은 19세에 세계바둑의 정상에 올랐고 사상 최연소 9단이 됐다. 바둑과 수학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확실히 바둑판 위엔 수(手)와 더불어 수(數)가 존재한다. 만약 느낄 수는 있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두터움이나 공격권 등의 가치를 수치로 환산시키는 능력이 있다면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수가 될 것이다. 그러나 두터움이란 지극히 추상적이어서 제아무리 뛰어난 컴퓨터도 그 가치를 환산해내기란 불가능하다. 바둑에서 컴퓨터가 인간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의 하나다.

안조영이 깊은 신음과 함께 달려간 흑 79. 이곳이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자칫 공격에 미련을 두다 이곳마저 빼앗기는 날엔 그야말로 끝장이기에 안8단은 서둘러 이곳으로 직행했다.

82로 전개한 상황에서 이창호9단은 백 우세를 조심스럽게 거론하고 있다. 84로 안정할 때 안조영은 다시 기로에 선다. 그는 이 부근에서 다시 30여분을 쏟아부으며 심혈을 기울인다.

안조영의 내심은 '참고도' 흑1을 두고 백이 A로 받아준다면 그때 우변에 뛰어들고 싶다. 그러나 상대는 이세돌이다. 고분고분 받지 않을까봐 걱정이다. 이건 수학의 문제가 아니라 심리학의 영역이다. 그래서 먼저 85로 돌입했고 88의 요소는 백의 수중에 떨어졌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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