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길]온 국민이 불순 세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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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춘천댐에서 강줄기를 따라 춘천시내로 들어오는 길이 있다.

그 길 중간쯤에 약수터가 있어서 자주 다니는 길이기도 한데 어느날 드라이브를 하다가 무심코 선간판에 적힌 표어를 읽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은 표어의 내용이었다.

그곳에 적혀 있기를 '온 국민이 불순세력' 이라지 않는가? 사실은 표어가 두 줄로 적혀 있었는데 '온 국민이 힘을 모아 불순세력 몰아내자' 였다.

그런데 그것이 무성한 나뭇잎에 가려져 '힘을 모아' 와 아래칸의 '몰아내자' 는 안 보이고 '온 국민이' 와 '불순세력' 이 합쳐 기묘한 구호를 연출해 내고 있었다.

나는 그날 졸지에 불순세력이 되고 말았다.

하긴 대통령도 불순세력으로 몰렸던 판에 나 같은 백성 하나가 불순세력이 되는 것쯤은 우스운 일 아니겠는가?

그 일이 있고 난 뒤 나 자신도 허위와 가식 따위로 가려져 왜곡되고 굴절된 모습이 없지 않을까 하고 가끔 생각해 보았다.

왜 없겠는가?가려진 양심,가려진 인격이 수두룩했다.

좀 편해지려고 양심을 덮어버리고 조금 더 욕심을 부리려고 인격을 덮어버리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물론 자신을 완벽하게 드러내놓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불필요하기도 하다.

가려져서는 안될 부분이 가려지고 드러나지 않아도 될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문제인 것 같다.

아담이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신 (神) 은 가죽으로 옷을 지어 그의 수치를 가려주었다.

인간이 신이 가려준 것만큼만 가리고 산다면 그야말로 투명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IMF시대가 끝나도 예전처럼 사회가 불투명하고 향락과 낭비에 빠져 진실과 양심이 가려진 세상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차라리 경제적으로 궁핍해도 지금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나부터 이번 기회에 가려져 있는 것을 벗겨내고 사회윤리와 개인양심을 회복하지 않으면 영영 '불순세력' 이 되고 말 것이란 생각이 든다.

김진국〈춘천중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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