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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의 ‘멈추지 않는 도전’ ② 못 말리는 게임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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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박지성 나오는 ‘컴퓨터 게임’에 빠진 박지성

박지성은 ‘방콕’족이다. 웬만해선 밖에 나가지 않는다. 주로 컴퓨터 축구 게임을 즐긴다. 박지성의 ‘멈추지 않는 도전’에 나오는 얘기다. 일본에선 너무 게임에만 몰두해 부모가 걱정하기도 했고, PSV 에인트호번 시절 엔 게임을 말리던 아버지와 한때 서먹한 기간도 있었다. 경기가 잘 풀리지 않을 때 게임을 통해 대리 만족을 얻은 것 같다는 게 아버지 박성종씨의 설명이다.


 한·일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2002년 5월 제주도에서 마무리 훈련을 하던 거스 히딩크 감독이 선수들에게 하루 휴가를 줬다. 선수 대부분은 모처럼의 휴가를 즐기기 위해 외출했지만 지성이와 김남일·이을용 등 3명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처럼 지성이는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요즘도 마찬가지다. 어쩌다 귀국을 해도 필요한 행사에 참석할 때를 빼곤 거의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낸다.

집에서는 대개 컴퓨터 게임을 즐긴다. 특히 축구 게임은 지성이의 소중한 친구다. 다른 취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재활할 때는 피아노를 배웠고, 골프를 치기도 했다. 하지만 피아노 치는 것은 꾸준한 취미가 될 수 없었고, 골프는 괜한 오해를 살까 봐 가까이 하지 않는다. 일본·네덜란드·잉글랜드를 거치면서도 오로지 축구 게임만이 흥미를 잃지 않는 유일한 취미다.

 #한·일 월드컵에 출전해 축구 게임에도 내 이름 올려야지

지성이가 축구 게임을 처음 접한 것은 2000년 일본 교토 퍼플상가에 입단한 이후였던 것 같다. 혼자 외롭게 외국에 나가 있다 보니 훈련과 경기가 없는 날엔 무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날엔 종일 축구 게임에 몰두했다. 나와 지성이 엄마는 컴퓨터 게임만 하는 아들을 걱정했는데 때마침 안효연(전남) 선수가 교토에 입단하면서 지성이도 바깥 출입이 늘기 시작했다. 지성이가 많이 밝아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지성이가 가장 먼저 시작한 축구 게임은 당시 유행하던 ‘FIFA 2002’였다. 무명 중의 무명 선수였던 지성이는 이 게임에서 한국 대표팀의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언젠가 지성이가 “다음 게임이 출시될 때는 내 이름이 나와 있어야 하는데…”라며 입맛을 다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반드시 2002 한·일 월드컵에 뛰고 싶다는 다짐이었다. 한·일 월드컵에서 지성이가 활약을 하고, 이후 자신의 이름이 축구 게임에 오르자 신기한 듯 게임에 더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봤죠, 아버지! 게임처럼 골을 넣었잖아요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번에 있을 때는 축구 게임 때문에 부자 사이가 냉랭해진 적도 있었다. 축구게임기만 잡고 있는 아들이 왜 이리 못마땅하고 밉던지 잔소리도 하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당시는 에인트호번 입단 초기로, 지성이가 극도로 부진할 때였다. 제대로 된 기량을 보여 주지 못해 입이 바짝바짝 마르던 그때, 집에서 축구 게임에만 열중하는 아들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괜스레 축구 게임 때문에 진짜 축구경기를 못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성이는 당시 축구 게임 외에 삼국지 같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도 즐겨했는데 밤늦도록 게임에 몰두할 때도 많았다.

“게임기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꾸짖자 지성이는 내 눈치를 보며 자제했지만 아예 끊지는 못했다. 어느 날 에인트호번 홈경기에서 지성이가 그토록 기다리던 골을 터뜨렸다.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힐 만큼 멋진 골이었다. 경기를 마친 후 지성이가 “아버지 봤죠! 게임처럼 멋지게 골을 넣었잖아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멋쩍은 웃음만 지어 보였다. 돌이켜보면 지성이는 축구 게임을 통해 대리 만족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현실에서는 홈팬과 동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암울하게 보냈지만 축구 게임에서만큼은 자신이 원하는 플레이를 펼치며 환호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임이 이미지 트레이닝에도 탁월하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지성이는 컴퓨터 게임을 통해 실제 경기장에서 보여 줄 자신의 플레이를 머릿속에 그렸는지 모른다. 

#맨유 입단 후 능력치 급상승 “와! 내가 이렇게 잘했나”

나는 컴퓨터 축구 게임에 문외한이라 잘 모르지만 게임기 안 선수들의 능력치는 수시로 달라지는 모양이다. 에인트호번에 있을 때만 해도 게임기 안 지성이의 능력치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고 한다. 2005년 여름 지성이가 맨유에 입단하자 능력치가 크게 올라 톱클래스 선수가 돼 있더라고 했다.

어느 날 게임을 하던 지성이는 “와! 내가 이렇게 잘했나”라며 게임 안의 자기 모습에 감탄하는 걸 봤다. 맨유에 와서는 축구 게임이 친구를 만들고 친해지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지성이는 이웃에 사는 맨유 수비수 파트리스 에브라(세네갈)와 게임을 통해 절친한 친구가 됐다. 원정 갈 때는 호텔에서 웨인 루니 등과 토너먼트로 축구 게임을 즐긴다고도 한다. 요즘 맨유 잔류 여부를 두고 화제가 되고 있는 카를로스 테베스(아르헨티나)도 우리 집을 자주 찾는데, 남미 선수들은 축구 게임은 젬병인 것 같다.

#축구 게임보다 예능 프로그램에 솔깃

요즘 들어 지성이가 축구 게임 하는 횟수가 뜸해졌다. 연일 프리미어리그와 챔피언스리그 등 중요한 경기가 있다 보니 집에 있을 시간이 적을 뿐 아니라 휴식시간이 주어져도 게임보다는 TV를 더 즐겨본다. 지성이의 새로운 관심사는 한국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들을 내려받은 후 시간이 날 때마다 즐겨본다. 특히 예능 프로그램은 빠짐없이 챙겨보는 것 같다. 예전에 ‘무한도전’ 프로그램에 티에리 앙리가 나온 것을 보고는 “내가 먼저 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예능 프로그램에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에브라가 최근 인터뷰에서 축구 게임에서 지성이를 이긴다고 말했다는데 사실은 짚고 넘어가자. 우리 집에서 게임할 때 지켜봤지만 에브라가 지성이를 이긴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다음 편에는 우리 가족과 다름없는 에브라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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