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월가 이끄는 ‘블랙록’ 아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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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미국의 사모펀드 블랙스톤에서 파트너로 일하던 로런스 핑크(현 블랙록 회장)는 피터 페터슨 회장의 방을 찾았다. 당시 서른일곱이던 핑크는 동료 몇 명과 함께 독립 회사를 만들기 위해 막 회사를 나온 상태였다. 하지만 ‘블랙록’이라는 새 회사 이름이 문제였다. 블랙스톤은 이들이 퇴사하려 하자 “회사 이름에 블랙과 스톤이 들어가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조건을 달았다. 핑크는 페터슨 회장과의 담판에서 “나중에 우리가 당신들보다 큰 회사로 성장하고 블랙스톤에서 나온 회사란 게 알려지면 오히려 당신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페터슨 회장은 결국 오케이 사인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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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의 호언은 적중했다. 이후 블랙록은 굵직굵직한 자산운용사를 잇따라 인수하며 미국 증시에 상장된 자산운용사 중 최대 규모로 성장했다. 현재 자산운용액은 1조2830억 달러이며 지난해 매출 50억 달러, 순이익 7억8600만 달러를 기록했다. 금융위기도 오히려 이 회사에 기회가 됐다. 월가의 대형 금융사들이 줄줄이 쓰러지는 가운데에서도 블랙록은 사세를 늘리며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뉴욕 타임스(NYT)는 월가 바깥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블랙록이 금융위기 이후 미 금융계를 쥐락펴락하는 ‘큰손’으로 성장했다고 20일 보도했다. 현재 블랙록은 금융위기로 타격받은 금융사들을 구제하는 과정에서 각종 정부 자문 업무를 도맡다시피하고 있다. 지난해 3월 베어스턴스가 JP모건에 매각될 때, 정부가 AIG와 씨티그룹의 거취를 결정할 때 자산 평가에서부터 간접적인 자문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작업을 맡았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모기지업체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을 구제하는 과정에도 참여했다.

블랙록이 발군의 실적을 올리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전문성에서 비롯됐다. 핑크 회장은 미국에서 모기지담보증권(MBS) 시장을 개척한 인물이다. 이를 바탕으로 자회사인 블랙록 솔루션은 복잡한 파생상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독보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핑크 회장은 재무부 고위관리들과 수시로 통화하며 금융위기 해소 방안에 대해 조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의 블랙록자산운용 양성락 사장은 “우리 회사의 위험관리 시스템을 사용하는 전 세계 투자자산 규모를 합하면 8조 달러에 달한다”며 “긴박한 상황에 처하면 사안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을 찾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현지에선 블랙록의 독주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민간 자산운용사가 정부의 정책방향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되면 ‘이해상충’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찰스 그래슬리 공화당 상원의원은 NYT에 “블랙록은 정부의 자산 매각 시기나 가격 등 내부 정보를 알고 있고, 동시에 전 세계 투자자들과 거래관계를 맺고 있다”며 “이해상충 위험이 매우 크지만 이를 통제하기 매우 어려운 상태”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20일 한국을 찾은 블랙록의 밥 돌 부회장은 “전 세계가 금융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과정에서 우리가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데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도 정답을 갖고 있진 않지만 전망을 제시하고 정부는 그것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월가의 새로운 강자가 보는 향후 시장 전망은 긍정적이다. 주식 부문 최고투자책임자(CIO)이기도 한 돌 부회장은 “불확실성이 남아 있긴 하지만 금융시장의 ‘적신호’가 ‘청신호’로 바뀌었다”며 “미국 부동산과 투자은행 부실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의 가닥을 잡은 만큼 시장은 전반적으로 상승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민근·김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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