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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산하 북녘풍수]5.만월대, 그 자생풍수의 표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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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만월대의 가장 큰 풍수적 특징은 건물을 배치하면서 인위적으로 균형을 잡으려 하지 않고 자연지세의 흐름을 따르려 했다는 점이다.

낮은 곳은 축대를 높이 쌓고 높은 곳은 깎아내리지 않은 채 계단을 쌓아 올라가는 식으로 처리한 뒤 그위 경사면에 궁궐을 지어놓았다.

더구나 창합문을 지나면 바로 나타나는 만월대 앞쪽의 회경전 (會慶殿) 과 송악산 쪽으로 조금 올라가서 자리잡은 장화전 (長和殿) 은 만월대의 중심되는 2대 궁궐이며 서로 이어진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일직선상에 놓여 있지 않다.

앞서 입구인 신봉문에서 창합문으로 올라가는 대궐 진입로도 조금 틀어져 있었다고 지적했다시피 회경전과 장화전을 서로 다른 평면상에, 그것도 서로 다른 좌향으로 건축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당시 그들이 중국의 풍수술이나 건축술을 그대로 받아들인 상태였다면 당연히 동일 직선상에 동일 좌향을 취했을 것이다.

그 점은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뒤 건축된 조선시대 건물들의 터잡기와 배치가 기하학적 균형을 갖추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이것을 나는 자생풍수의 증거로 보는 것이다.

중국 이론 풍수가 체계화된 이론에 따라 터를 잡는 데 반해 자생풍수는 자연지세를 그대로 의지한다는 특징으로 요약된다.

따라서 중국풍수가 어디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일반 이론적 측면이 강하다면 자생풍수는 풍토 적응성은 뛰어나지만 체계화나 이론화가 매우 어렵다는 단점을 갖게 된다.

땅은 땅 나름대로의 고집과 질서가 있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리학 (地理學) 은 그 땅에서 집적된 지혜의 소산이 아니면 땅에 무리를 가하는 일을 벌이게 될 수도 있다.

조선시대 여러 유적지에서 내가 느낀 것은 풍수 이론상으로는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부자연스럽고 경우에 따라서는 땅에 상당한 무리를 가해 가며 구조물을 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중국 이론풍수에 탐닉한 조선시대 양반들의 틀에 박힌 터잡기와 건축물 배치가 초래한 결과라 생각한다.

만월대에서는 비록 그것이 세련된 맛은 덜 하지만 훨씬 자연스럽고 주위 산천형세에 어울린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여기에는 또 이런 얘기도 전해진다.

우리 풍수의 시조인 도선국사 (道詵國師)가 그의 유기 (留記)에서 이르기를 "송악산 아래 궁궐을 지을 때는 소나무를 많이 심고 절대로 흙을 파헤치지 말 것이며 오히려 토석 (土石) 을 돋워 세우라" 고 했다는 것이다.

앞서 지적한 자생풍수의 사고와 다를 바가 전혀 없는 유언이다.

만월대 뒤로 철벽을 두른 듯한 송악산은 그 모습이 서울의 북한산을 너무도 닮았음에 놀랐다.

내 얘기를 들은 우리 일행 모두가 그에 수긍했으니 나의 주관적 안목만은 아니었다고 믿는다.

만약 개성을 고향으로 가진 실향민들이 당장 고향의 상징인 송악산을 보고 싶다면 송추나 일영 쪽으로 가 북한산과 도봉산 연맥을 바라보면 아쉬운 대로 망향의 쓰라림을 조금은 쓰다듬을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송악산과 북한산이 닮게 되는 일이 벌어졌을까. 나의 짐작은 이렇다.

조선 태조 이성계 (李成桂) 는 개성의 산천을 수도의 전형적 형상으로 마음 속에 새겨 넣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그의 성격이 송악산과 같은 산을 선호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나는 오래 전 양주 회암사를 답사했을 때 이런 감회를 기록에 남긴 바 있는데 오늘 그것을 다시 들춰냄으로써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을 대신코자 한다.

양주 회암사는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인연이 깊게 닿아 있는 절이다.

절 뒤쪽에는 칠봉산으로 뻗은 등산로가 있다.

그 등산로 중턱에 올라서서 주변 형세를 관망해 본다.

문득 이성계의 성격에 생각이 미친다.

사람들은 자기 성격에 어울리는 터를 찾는 습성이 있다.

진취적이고 자신을 내세우기 좋아하는 성품의 사람은 툭 터진 산등성이를 좋아한다.

내성적이고 온화한 성품의 사람은 안온하게 사방이 산으로 닫힌 전형적인 명당 터를 즐긴다.

이 로써 역사상 인물에 대한 환경심리학적인 성격 추정이 가능하리라 보지만, 아직 학문적으로 정립된 바는 없다.

풍수를 하는 입장에서 이성계가 선호한 터들을 살피다보면 그의 성격이 어느 정도 떠오른다.

회암사터 역시 그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해 흥미롭다.

그가 즐겨한 땅들은 역사에 분명히 기록된 곳으로만 따져 함흥 일대, 서울의 북한산.북악산.인왕산.계룡산, 그리고 이곳 천보산 일대다.

함흥은 본 일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북한.북악.인왕.천보.계룡은 모두 곳곳에 암석 쇄설물들이 깔려 있고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정상을 압도하는 풍광의 산들이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덕있는 산들은 아니라는 뜻이다.

어떤 면에서는 냉랭한 살기가 산 전반에 은은히 내비치고, 강골 (强骨) , 척박 (瘠薄) 의 기맥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무식한 천박성이 드러난 것은 아니니, 좋은 의미에서의 전형적인 무골 (武骨) 이라 표현할 수 있는 성격의 산들인 것이다.

그런 산들의 계곡 사이사이에는 의외로 비옥한 토양이 산재해 수목을 울창케 해주니, 실로 절묘한 풍운아적 풍모라 아니 할 수 없다.

쿠데타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있게 마련인 단순성과 강직성, 그리고 무모함 따위가 산의 성격에도 배어 있다니 실로 감탄스러운 자연의 조화속이다.

더욱 절묘한 것은 이런 산들이 지금도 군 부대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북악과 인왕은 청와대 경호 때문에 대부분의 지역이 군 주둔지가 돼 있고, 계룡대에는 삼군 (三軍) 본부가 자리잡고 있으며, 회암사 뒷산도 군 훈련장으로 민간인 출입이 금지돼 있다.

우연의 일치라기보다 그 산들의 성격을 사람들이 잘 파악해 그에 맞는 입지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개성은 이성계에 의해 피로 물들여진 곳이다.

아무리 그의 성격에 송악산이 맞고 그의 심상에 수도 주산으로서 송악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엄중하다 하더라도 송악산을 그대로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개성을 떠나고 싶어했으리라. 이 점은 그가 고려를 폐하고 왕위에 오른 뒤 아직 나라 이름을 짓기도 전에 서울부터 먼저 옮길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글 = 최창조·그림 = 황창배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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