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틴] '루슬란과 류드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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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슬란과 류드밀라
푸슈킨 지음, 카랄리코프 그림, 조주관 옮김,
비룡소, 226쪽, 1만1000원

누가 동화 같은 사랑을 꿈꿔보지 않았으랴. 그러나 마냥 짜릿하고 행복하게 진행되는 사랑은 동화 속 사랑이 아니다. 주인공들은 늘 어떤 식으로든 서로를 잃어버리며 서로를 다시 찾기까지 숱한 역경과 고난을 넘어야 한다. 그런 시련을 이겨냈기에 그들의 사랑은 더욱 아름답고 애틋한 것이 되고 동화 속 사랑은 진실성을 얻게 된다.

푸슈킨의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의 주인공들의 사랑도 그렇다. 류드밀라는 옛날 키예프 러시아의 위대한 왕 블라지미르의 셋째 딸이며 루슬란은 이웃나라 왕자이다. 왕자와 공주는 결혼식을 올렸으나 첫날밤 신부가 갑작스레 사라져버린다.

“아, 친구들이여! 사랑으로 고통 받는 자가/ 아무런 희망도 없는 정열로 괴로워한다면/ 사는 게 얼마나 슬프겠는가./ 어쨌든 살아갈 순 있겠지./ 그러나 열정과 눈물로 슬픔의 시간을 보내며/ 기나긴 기다림 끝에 사랑하는 신부를/ 안으려는 순간/ 갑자기 신부를 영원히 잃어버렸다면 어떻겠는가./ 오, 친구들이여! 난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이제 슬픔에 잠긴 신랑 루슬란과 공주를 짝사랑하던 세 기사, 로그다이와 파를라프, 라트미트가 공주를 구하기 위해 모험의 길을 떠난다.

작가 푸슈킨(1799~1837)은 러시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국민작가로 꼽힌다. 설령 그를 잘 모르는 독자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그의 시는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1820년 약관의 푸슈킨에게 작가로서의 명성을 굳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러시아의 청소년들에게 고전으로 주어지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작품을 문학사적 의의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있게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작품의 독창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옛이야기의 모티프를 차용하여 자신의 창작 세계를 펼쳐 보이는 것은 19세기 초 서구 낭만주의 문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당대 러시아에서는 바실리 주코프스키(1783~1852)가 초기 낭만파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히고 있었다. 푸슈킨 역시 『루슬란과 류드밀라』에서 풍부한 전설과 민담을 남긴 9~10세기 키예프 러시아를 작품의 무대로 삼고 옛이야기의 모티프를 차용하지만, 네 번째 노래에서 노골적으로 암시하듯이 주코프스키의 감상적이며 종교적인 채색을 거부하고 철두철미 현세적 시각을 견지한다. 이는 당대 평자들로부터 전통적인 도식을 벗어난 작품이라는 열렬한 찬사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문학사적 의의가 곧바로 현재 독자의 사랑과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독자의 사랑은 등장인물들의 생생한 개성, 다층적인 구성에서 오는 이야기의 재미, 주제에의 공감을 필요로 한다. 일편단심의 용감한 기사 루슬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세 기사 역시 전형적인 성격을 대표하면서도 생생한 개성으로 다가온다. 로그다이는 넓은 키예프 벌판을 칼 한 자루로 정복한 용감한 기사이지만 공명심 때문에 눈이 멀어 진정한 적 마법사 체르노모르가 아닌 라슬란에게 칼을 들이대다 죽음을 맞고, 파를라프는 술자리에선 아무도 당할 자가 없으나 전쟁터에서는 벌벌 떠는 겁쟁이답게 위험 앞에서 길을 되돌렸다가 신부를 가로채며, 성급하고 욕정적인 터키인 라트미트는 가는 길에 만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류드밀라 역시 슬픔에 여위어가기만 하는 고전적인 여주인공과는 다르다. 그녀는! 비록 납치되어 갇혀있으나 먹을 것을 거부하지 않을뿐더러 난쟁이 마법사의 마술 모자를 뺏는 대담함을 보인다. 이러한 생생한 인물들과 함께 루슬란을 도와주는 핀란드의 현명한 노마법사, 그에게 앙심을 품고 체르노모르와 음모를 꾸미는 마녀 나이나, 동생 체르노모르에게 배반 당해 머리통만 살아있게 된 기사 이야기가 서로 얽히면서 이야기의 긴장과 재미를 더해준다. 당연히 루슬란은 공주를 구한다. 그러나 동화의 흔한 결말처럼 거기서 “왕자와 공주는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한번의 반전이 기다린다.

김경연(서울대 강사·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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