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시인의 길 일깨운 ‘시란 무엇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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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순간의 깨달음으로 새로운 차원에 들어서는 경우가 있다. 선가(禪家)에만 차원의 변화가 있는 게 아니라 사람살이에는 언제나 차원의 문이 놓여 있기 마련이다. 눈앞의 현실 속에서 좌충우돌하는 현대인에게는 언제나 그 현실의 고통으로 인해 새로운 차원을 꿈꾼다. 그러나 당장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그 고통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혹은 극적 반전 없이 삶을 버텨내기 힘들 때, 알 수 없는 어떤 ‘일순간의 충격’에 의해 차원의 문은 열린다.

김지하 시인도 ‘차원 변화’를 얘기한 적이 있지만, ‘두 개의 극단과 극단이 왕래하거나 병존하거나 교체되면서 역설적인 패러독스(paradox), 역설적인 균형을 이루는 것이 마음이다.’(『예감에 가득 찬 숲그늘』). 요컨대 차원의 문은 ‘새로운 균형’인 셈이다. 현실의 고통을 이겨내려는 오랜 노력의 산물이 차원의 변화다. 때문에 새로운 차원이 필요없는 사람에게는 결코 차원의 문은 다가오지 않는다.

아마 1991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시를 쓰기는 써야 되는데, 또 나름대로 노력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크리스마스 즈음의 그 열병, 신춘문예 열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소식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도통 소식은 오지 않고, 그만큼 내면은 황폐해졌다. 끝내 시는 나를 버리는가. 그렇다면 내가 먼저 시를 버리겠다. 그후 군대에 갔고, 대학원엘 갔고, 취직을 했고, 그러면서 12년이 훌쩍 지나갔다.

그러다가 유종호 교수의 『시란 무엇인가』를 김영산 시인의 소개로 읽게 되었다. 그 책 속에는 십여 년 전의 ‘열병’을 참으로 부끄럽게 만드는 시적 진실이 숨어 있었다. 당시 간절하게 기다리던 ‘소식’에의 열병은 말하자면 반시(反詩)적인 무엇이었다. 시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 하는 자가 어찌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을까?

내게 있어 『시란 무엇인가』는 극적 반전이자 차원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였다. 좀 건방진 소리가 될 것 같아 조심스럽지만, 비로소 시를 멀찍이 보기도 하고, 코앞에 갖다놓고 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돌려서 보기도 하는 나름의 여유가 생겼다. 이것이 김지하 시인이 말한 ‘역설적인 균형’이라면 균형이겠다. 이 때부터 시를 쓸 때면 조급한 마음속에 느긋한 자세가 나오기도 하고, 회사 업무를 보는 중에도 시가 나오는가 하면, 잠을 자다가도 시가 찾아오고 그랬다.

당연한 소리지만, 아직 너무나 멀고 아득하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차원의 문은 얼마나 필요한가.

김재홍 시인(2003년 중앙신인 문학상 시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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