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완의 록앤론]신중현 새 앨범 '김삿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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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신중현의 새 앨범 '김삿갓 (1998.킹레코드)' 을 들었다.

"천리길 행장을 지팡이 하나로 의지하고…" 로 시작하는 '간음야점' 에서 떠나 "…가을 바람도 소슬한데 금강산에 들어왔도다" 로 끝을 맺는 '금강산시' 에 도착하기까지, 다 합하여 1시간 21분 6초간, 모두 열아홉 곡의 방랑길이었다.

백색/흑색음반이라 이름 붙여진 두 장의 앨범을 검은색의 자켓이 품고 있는 더블 앨범이다.

모든 가사는 김삿갓이 지었고 모든 음악은 신중현이 만들고 연주했다.

이 음반은 둘 사이에 술상을 봐놓고 시간의 골을 넘어 나누는 대화이다.

열아홉 곡이지만, 한 곡이기도 하다.

장단.코드.진행.멜로디, 모든 것이 한 실에 꿰어진 구슬처럼 연속적이다.

산 하나의 열아홉 구비를 접어들고 접어들면서 나는 구경하고 듣는다.

언제나 새로운 것을 들을 때 그러하지만, 듣는 방식 자체를 또다시 고쳐 잡는다.

이번엔 어른 말씀을 들어주듯 듣는다.

언제 내 느낌을 뽑아 들어야할지 잘 모른다.

약간 술에 취해 기우뚱한 자세로 말하는 그 말의 뜻을 새기기 전에, 말하는 모습이나 그 자리의 분위기를 음미하는 방식으로 듣는다.

서양인들은 아마 이런 듣기를 잘 모르겠지만, 우리라면 누구나 안다.

그의 넋두리는 긴 하나의 잡소리이다.

그는 취해 있다.

취기는 무너짐을 견디게 하는 한 힘이다.

속으로는 다 재고, 겉으로는 되는 대로 떠든다.

때로는 고고 리듬, 때로는 디스코, 때로는 육자배기. 그는 지나온 70년대, 80년대의 길 위에 떨어진 이런저런 리듬을 주워 취한다.

리듬으로 추억을 달랜다.

괴팍한 목소리로, 일갈하는 톤으로, 그는 타령을 늘어 놓는다.

주관적이고 내면적이다.

우리 대중음악 사상 처음으로 완전한 '내면일기' 다.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 은 그들 넷의 집단적인 내면일기라서 그 흐름이 의식의 흐름과 비슷한데, 이 앨범도 그렇다.

60년대가 다 그랬지만, 지미 헨드릭스의 '일렉트릭 레이디 랜드' 처럼 그는 감각이 가는 대로 내버려 두고서 자기 감각이 가는 길을 스스로 구경한다.

이 앨범은 쓸쓸하고 적적하다.

60대에 접어든 한국 로큰롤 1세대 (60대라면 세계적으로도 로큰롤 1세대에 해당한다) 의 지금 심정이 은연중 토로되어 있다.

그의 작업실은 문정동에 있는데, 그 곳은 신세대 옷가게들이 늘어서 있기로 유명한 동네다.

그 거리의 한 건물의 어두침침한 지하로 들어가야 그를 만날 수 있다.

그는 그 속에 얼마 동안이나 침잠하여 김삿갓과의 대면을 계속했을까. 쓸데없는 작업인 것 같아 그만두려고도 많이 했을 것 같다.

이 음반 곳곳에 신중현이 몇 번이고 넘은 포기의 고개가 있다.

나는 그 고개들을 구경하면서, 고개들을 넘게 하는 힘이 바로 '쓸쓸함과 적적함' 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그의 침잠은 방랑이기도 하다.

그는 양키의 로큰롤을 장돌뱅이의 타령과 연결시킨다.

남의 것을 한다는 굴욕을 그렇게 삭인다.

따지고 보면 록 하는 사람들이나 장돌뱅이나 모두 떠돌이들이다.

세상은 그들을 대개 경멸한다.

그들은 그래서 세상 주위를 돈다.

그 떠돌이 중에는 김삿갓도 있고, 그래서 신중현이 그를 만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다.

그 만남을 통해 신중현은 한국 로큰롤의 역사를 자기 관점에서 정리하고 있다.

그래서 그 작업은 혼자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젊은 사람들이 이제 우리 로큰롤 역사를 제대로 정리해야할 때가 된 것 같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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