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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의 시시각각

위험한 우정, MB와 황석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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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대통령이 문학적 상상력이 풍부한 지식인과 교유하는 것은 사고(思考)의 지평선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지식인이 책을 통해 간접경험을 쌓듯 대통령은 지식인을 통해 간접경험을 늘릴 수 있다. 더군다나 MB처럼 대북 경험이 부족한 우파 대통령이라면 북한과 소통의 체험이 있는 좌파 지식인도 유효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교유가 생산적이 되려면 조건이 있다. 먼저 대통령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면서 상대방으로부터 경험과 아이디어를 추출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교유 상대방의 인격이 중요하다. 좌든 우든 대통령이 전용기에 태울 정도라면 어느 정도 국민이 신뢰할 인격을 갖춰야 한다.

황석영이 처음으로 몰래 북한에 들어간 것은 1989년 3월이었다. 북한의 KAL기 테러가 일어난 지 채 1년 반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비행기 폭파로 중동에서 돌아오던 근로자들이 많이 죽었다. 그중에는 MB가 회장으로 있던 현대건설의 근로자도 60여 명이나 있었다. 황석영의 조국 대한민국은 88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학생과 노동자의 외침 속에서 또 다른 도약을 위해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근로자들의 뼛조각이 아직 벵골만 바다를 떠돌고 있을 때 황석영은 평양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인민군 장교의 무동을 탔다. 김일성은 100여 만 동포를 죽인 한국전쟁의 전범이다. 황석영은 김일성 80돌 회고록 작업에 가세해 김일성 미화에 문장력을 헌사했다. 황석영은 92년 미국으로 달아나 있으면서 김일성을 “을지문덕·이순신·세종대왕 같은 위인의 한 사람”으로 꼽기도 했다.

좌든 우든 사상은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든 작가든 음악가든 자신이 자유를 펼 수 있게 물질적 기반을 제공해준 국가를 잊어선 안 된다. 70년대 가발 하나라도 더 수출하려고 졸린 눈을 비볐던 여공들이 있었기 때문에 황석영은 소설 『장길산』을 쓸 수 있었다. 작곡가 윤이상도 마찬가지다. 조국은 북한 무장공비들과 싸우고 달러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공장 일에 목을 매는데 그는 평양에 가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예술” 운운하고 있었다. 그런 윤이상이 진심으로 조국에 사죄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황석영도 마찬가지다. 그는 5년 징역을 살았다고 하지만 진정으로 대한민국에 사죄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황석영이 진정으로 조국과 시대를 고민하는 무게 있는 사상가여야만 그의 친구 MB에게 도움이 된다. 그가 진정한 고민 없이 문학적 상상력만 외치는 이벤트성(性) 예술가라면 MB의 무게도 같이 낮아진다. 그리고 ‘전용기 정치’를 하려면 MB는 자신의 집권을 도왔던 보수세력을 먼저 배려했어야 한다. 외국 정상을 만나러 가는 비행기에 이들을 먼저 태웠어야 한다. 좌파로부터 분서(焚書)의 박해를 받았던 이문열이나 극좌파의 난동으로부터 한·미 동맹을 사수하려 했던 서정갑 같은 보수 운동가를 태웠어야 한다. 지난해 촛불을 겪으면서 MB는 국가 정체성의 혼란을 개탄하곤 했다. 그런데 이젠 보수세력이 대통령의 정체성을 걱정하고 있다. MB는 서울시장이던 2004년 세계문화오픈(WCO) 행사가 열린 뉴욕에서 황석영과 통음했다고 한다. 그런 개인적인 교유와 대통령의 정치는 다른 것이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