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제조업 만리장성 넘는 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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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호 35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한국 경제에 대한 외부 시각이 수시로 바뀌고 있다. 지난해 리먼브러더스 파산 직후에는 한국 은행들의 취약성을 부각시키더니 지난 연말에는 우리 제조업의 높은 대외 의존도를 우려하며 성장률 전망치를 앞다퉈 하향 조정했다. 최근에는 다시 분위기가 바뀌어 세계 경제가 회복되면 한국이 가장 빠른 회복세를 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관심은 위기 극복 과정에서 한국 제조업이 ‘세계의 공장’으로 우뚝 설 중국을 넘어설 수 있을지에 모인다.

이 시점에서 한국에 진출한 한 일본 기업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바로 쇠락하는 소니를 대신해 일본 전자업계의 선두주자로 나서고 있는 캐논의 사례다. 이 회사가 처음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85년. 현재 ‘캐논코리아비즈니스솔루션’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 안산에서 사무기기를 만들고 있다. 지난해에도 프린터·팩스·복사기 기능을 합친 복합기 200만 대의 수출 실적을 올렸다. 이 회사가 우리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풀어야 할 과제는 다른 한국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의 벽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중국에도 캐논의 생산공장들이 있어 이들에게 생산 물량을 뺏기지 않으려면 인건비 차이를 뛰어넘는 생산성 향상이 필요했다.

해결의 열쇠는 캐논 본사 특유의 셀(cell)생산 방식에서 찾았다. ‘도요타 방식’이라고도 알려진 이 방식은 낭비를 없애고 작업자의 자발적인 업무 개선을 통해 생산성을 극대화하려는 것이다. 현장에는 숙련도 수준이 다른 작업자들이 있게 마련이고 컨베이어는 생산성이 가장 낮은 사람에게 맞춰지게 된다. 이 때문에 발생하는 시간과 비용의 낭비를 없애기 위해 컨베이어 벨트를 걷어내고 제품별로 능력이 비슷한 사람들로 작업팀을 만들어 각각 제품을 만들도록 했다.

작업에 익숙해질수록 작업조 인원을 줄여 나가 생산성을 높였다. 나중에는 3000여 개의 부품이 들어가는 중대형 컬러복사기를 혼자 몇 시간 안에 조립할 수 있는 명인도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셀을 탄력적으로 운영해 수주에서 납품까지 걸리는 시간, 소위 리드 타임을 획기적으로 줄여 고객 요구에 신속히 대응했다. 나아가 부품이나 완제품 형태의 재고를 줄여 비용도 절감했다. 그 결과 중국 공장의 생산성을 앞서가며 1000명이 넘는 고용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셀 생산 방식을 정착시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우선 노동자들에게 스스로 업무를 개선해 생산성을 올릴 수 있도록 자긍심을 높여 주는 고도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노조도 설득해야 한다. 분야도 다품종 소량생산에 맞는 제품군이어야 한다.

이런 장벽들을 뛰어넘는다면 중국으로의 제조업 이탈과 일자리 감소 같은 고민들을 해결할 수 있다. 단순한 인건비 경감보다 고객 니즈에 대한 대응 능력, 각종 낭비를 줄이는 혁신 능력이 갈수록 더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중국의 임금이 싼 것은 맞지만 우리 제조업의 생산원가 중 인건비 비중은 이미 7% 수준으로 떨어졌다. 중국의 생산여건도 위안화 절상, 신노동법 실시에 따른 인건비 부담 증가 등으로 악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중국이 중요한 생산기지 역할을 지속하겠지만 역시 한계를 갖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에서 제조업을 하기 어렵다’는 고정관념은 버려야 한다.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서비스업도 좋지만 건실한 제조업이 중요하다는 게 분명해졌다. 우리에게는 개도국에서 찾기 어려운 우수한 연구 인력과 생산 기술, 현장에서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창의적인 생산인력이 있다. 이들의 잠재력을 충분히 이끌어낼 수 있는 기업인들의 리더십과 유연한 노동시장, 개방적인 사회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우리가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승자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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