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항공업종의 회계 특수성 인정해 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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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뉴스 분석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조선 빅3’는 지난해 세계 선박 발주량의 절반 가까이를 맡았다. 그러나 이들 업체는 지난해 한때 부채비율이 1500%로 치솟았다. 선박을 수주해 건조하는 과정에서 서너 차례에 걸쳐 받는 선수금(총액의 약 80%)이 회계기준상 부채로 잡히기 때문이다.

조선업계는 선수금을 ‘이자를 물지 않는 부채’라고 말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원화가치마저 떨어져 부채비율이 급등했다.

지난해 10월 이 같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금융위원회가 일부 회계처리 방식을 변경했지만 장부상 착시현상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중소 조선소는 자본잠식 상태에 빠져들기도 했다.

한국조선협회의 강사준 경영지원부장은 “선박 수주를 많이 할수록 부채비율이 늘어나 국가신인도에까지 악영향을 받는 일이 생기고 있다”며 “국제회계기준이 도입되는 2011년에는 이 같은 착시현상이 제거될 수 있도록 검토와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부채 문제에 관해서는 항공업계도 고민이 많다. 새 항공기 구입을 위한 외화부채가 늘 말썽이다. 대한항공의 경우 비행기 구입 외화부채가 47억 달러, 아시아나항공은 10억 달러에 이른다. 보통 비행기를 살 때는 자기자본이 20% 정도 투입되고 나머지 80%는 외화대출이다. 이 대출금을 10년간 나눠 갚는 방식이어서 상환기간 내내 환율 동향을 예의주시해야 한다. 환율이 등락하면 부채비율도 들쭉날쭉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은 “지금까지 대기업의 재무구조를 평가하는 데 부채비율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며 “항공·조선업종은 특성상 부채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는데, 이런 내용이 오해되는 바람에 기업가치가 떨어지는 등 기업경영에 어려움이 많다”고 말했다.

전경련이 항공·조선업종의 재무약정 체결을 일시 유예해줄 것을 최근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에 건의한 것도 이들 업종의 특수성을 십분 이해해 달라는 취지다. 원화가치 하락과 현실부적합한 회계기준 탓에 부채비율이 높아졌는데, 일괄적 기준을 적용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주채권은행은 매년 12월 말 재무제표를 기준으로 주채무계열(그룹)에 대한 재무구조를 평가한다. 평가 결과 합격기준에 미달하면 해당 그룹과 재무 구조개선 약정을 체결한다. 올해에는 14개 그룹이 불합격 판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고, 이 중 10여 개가 채권은행과 이달 안으로 약정을 맺을 예정이다.

금융 당국이 획일적 기준을 적용하는 바람에 기업들이 불만을 터뜨린 것은 1998∼99년 외환위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부채비율을 200% 이내에 맞춰야 한다는 기준 때문에 대기업들은 우량자산까지 대거 매각해야 했다.

업종별로 사정을 감안해야 한다는 재계의 요구에 당국과 금융권도 일단은 일리가 있다는 입장이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합동으로 구성된 기업재무개선지원단의 관계자는 “약정은 주채권은행과 해당 대기업이 협의해 결정하는 것”이라고 선을 두면서도 “부채비율 등 재무지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환율의 급격한 변화 등 특수 요건도 감안해 약정을 체결하도록 지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구조조정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당국의 전반적 분위기는 강경한 편이다. 재무개선지원단 측은 “특수 요인을 감안했는데도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면 약정 체결 후 계열사나 자산의 매각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최근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부실 기업들이 빨리 구조조정돼야 건실한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다”며 채근한 것도 강경 분위기 조성에 한몫하고 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이달 내로 대부분의 그룹이 약정 체결을 완료할 계획”이라며 “그러나 채권단 내부의 이견이나 기업 저항 때문에 두세 곳은 다음 달에야 약정 체결이 이뤄질 전망”이라고 말했다.

김준현·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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