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당선자-김종필명예총재 '인연 37년'…5·16이후 명암갈린 정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한사람 (JP) 이 '보수원조' 라면, 또 한사람 (DJ) 은 '진보기수' 로 그 반대편에 있었다.

DJ는 때로 기득권측에 의해 '좌파' 로 매도될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두사람은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했다.

DJ는 한국의 민주화를, JP는 조국 근대화를 명분으로 삼았다.

金대통령당선자와 김종필 총리지명자는 각각 36세, 35세였던 61년 5.16때 '기묘한 인연' 을 맺었다.

당시 김종필 육군본부 정보기획과장은 "국가의 입법.사법.행정 3권을…군사혁명위원회가 완전히 장악했다" 는 문안을 작성, 자신이 직접 중앙방송국을 통해 공포했다.

3일전엔 金당선자가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두번 낙선끝에 승리했다.

이날 金당선자는 국회에서 의원선서를 하기 위해 열차로 상경하다 이 소식을 듣고 좌절을 맛봐야 했다.

정계입문부터 두사람의 명암이 엇갈렸던 것이다.

박정희.윤보선 (尹潽善) 후보가 대결한 63년 대선에 이어 한.일협상 (64년)→3선개헌 (68년)→10월유신 (72년)→김대중 납치사건 (73년)→朴대통령 서거 (79년) 의 굵직굵직한 현대사의 굴곡을 겪으면서 두사람은 계속 '적대적 위치' 에 있었다.

두사람이 정적 (政敵) 관계에서 동병상련 (同病相憐) 으로 돌아선 것은 80년 등장한 신군부에 의해서다.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은 가택연금을, DJP는 미국에서 망명아닌 망명생활을 해야했다.

87년 이후엔 명실상부한 3金시대가 열린다.

김대중의 평민당, 김종필의 공화당, 김영삼의 민주당이 그것이다.

90년 金당선자는 1盧2金 (노태우.김영삼.김종필) 의 3당합당으로 쓰라린 정치적 시련을 맞이한다.

92년 대선에선 김종필 민자당대표가 김영삼 대통령후보를 적극 도와 김대중 민주당후보에게 결정적 패배를 안기게 된다.

당시 김종필 대표는 김대중 후보를 겨냥해 "색깔이 붉으죽죽한 사람" 이라고 비난했다.

그런 김종필 지명자가 95년 김영삼 대통령에게 버림받았다.

金당선자와 본격적인 협력관계가 시작된 것도 그때부터다.

김종필 자민련총재가 국민회의 공천자인 조순 (趙淳) 서울시장후보를 공식 지지키로 한데 대해 (95년 지방선거) , 김대중 국민회의총재는 자민련의원을 빼가는 김영삼 대통령을 규탄하는 양당 장외집회 (96년 총선이후) 로 화답했다.

이같은 토양에서 만 1년간의 'DJP 후보단일화 협상' 이 진행돼 두사람은 공동집권에 이르게 됐다.

전영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