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천국 '라부안' 역외펀드 지옥 전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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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말레이시아 보르네오섬 동북단에 자리잡은 '조세 피난처 (Tax Haven)' 라부안. 한때 이곳은 증권.투신사 등 국내 금융기관들에 '투자자의 천국' 으로 불렸다.

불과 몇해 전까지 '라부안에 펀드 하나 없으면 바보' 소리까지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라부안은 잊고 싶은 악몽이 돼버렸다.

90년대초 자본시장 개방이 시작되면서 역외펀드는 정부의 장려대상이었다.

역외펀드를 설립하면 그 대가로 해외투자펀드 설립허가를 내주기까지 했다.

당연히 증권.투신사를 중심으로 역외펀드 설립 붐이 일었다.

라부안에선 1주일이면 회사 하나를 차릴 수 있었다.

설립 비용이 1만달러 (당시 약 1천만원) 면 족하고 자본이득은 면세되며 이자.배당소득도 15%의 원천징수로 끝이다.

대형 증권사는 평균 4~5개씩, 많게는 10개 넘게 이곳에 역외펀드를 세웠다.

이들 펀드는 금리가 싼 현지 외국계은행 돈을 마구 끌어다 썼다.

지금까지 10억달러 넘게 출자됐고 차입금을 합치면 투자액은 20억달러가 넘는다.

국내 증시의 외국인 자금중 말레이시아가 미국.영국에 이어 3위를 기록중인 것도 다 라부안의 국내 증권사들이 세운 역외펀드 덕이다.

그러나 국내 경제상황이 나빠지면서 날벼락이 떨어졌다.

증시는 바닥을 모르게 폭락했고 급기야 외환위기까지 닥쳤다.

국내 증시에 60% 가량 투자했던 라부안의 역외펀드는 큰 손실을 입고 말았다.

엎친데 덮친 격이랄까. 파생상품거래로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사실이 알려지면서 라부안 붐은 급속히 냉각됐다.

달러값이 폭등했고 차입이자도 덩달아 올랐다.

지급보증을 선 국내 은행들이 왕창 물린 것도 드러나 사회 여론이 나빠졌다.

대우증권은 올들어 3개의 라부안 역외펀드를 청산했다.

다른 증권사들도 없애거나 철수준비를 하고 있다.

증권사 국제영업담당 간부의 한마디. "의욕도 여력도 없습니다.

꼭 필요한 역외펀드 설립도 말 한마디 못꺼내는 형편입니다.

" 투자자의 천국 라부안이 불과 몇년만에 '라부안에 가면 바보'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이정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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