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너는 官治, 나는 개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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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재계가 안팎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극심한 자금난 속에 부도 막기에 급급한가 하면, 다른 한쪽으로는 구조조정을 휘몰아가는 정치권의 압력에 전전긍긍이다.

대기업 위주의 한국 경제가 이꼴이 됐으니, 그들에게 비난이 집중되는 것도 하긴 당연한 일이다.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당선자는 물론 새 판을 짜나가는 차기정권 중심세력의 재벌개혁 의지는 확고한 듯 싶다.

명분이나 당위성에 대해 누구도 시비걸 문제가 아니다.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구조조정을 하자는데 누군들 반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너무 살벌하고 일방적이다.

아무리 훌륭한 정책도 흠이 있게 마련이고, 따라서 반대주장도 나오게 마련인데 아무도 시비걸 엄두를 못낸다.

최소한의 토론도 없다.

자칫 엇나가는 말을 내비치기라도 했다간 재벌앞잡이로 내몰리기 십상이다.

모두가 일사불란 (一絲不亂) 하게 한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바로 이 점이 꺼림칙하다.

일사불란한 개혁노력은 과거에도 여러차례 보아 왔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해서 성공했던 경험은 별로 기억에 없다.

공교롭게도 시작할 때 큰소리쳤던 정책일수록 종국에 가서 흐지부지됐었다.

이번에야말로 용두사미식의 재벌개혁이 돼서는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에 저질렀던 실수의 되풀이는 막아야 한다.

사실 정치인들의 호통에는 기업도 이골이 났다.

무리한 강압은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해결된다고 믿고 있다.

지금까지의 경험이 그랬다.

기업이 진정 무서워하는 것은 고함소리가 아니라 합리적인 제도로 꼼짝 못하게 붙들어 매는 것이다.

상호지급보증 폐지와 결합재무제표 작성이 좋은 예다.

전자는 부실기업의 퇴출문제를 해결하는 관건이요, 후자는 경영의 투명성 문제를 단숨에 해결하는 지름길이다.

국제통화기금 (IMF) 도 한국 재벌문제에 대해 바로 이 점을 지적해 왔다.

일정표를 만들어 재벌들이 이것들을 제대로 지켜나가도록만 한다면 차기정권의 재벌정책은 대성공이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재벌몰이' 는 도를 넘어서고 있는 것 같다.

소위 빅딜이라는 이름으로 개별기업들의 상호교환을 날짜까지 박아가며 몰아붙이더니 급기야는 비서실을 없애라, 회장실을 없애라는 '지시' 까지 내리고 있다.

아마도 이 지시를 거부할 강심장의 한국 기업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회장실이나 비서실의 기능에 문제가 있다면 관련법을 고치면 될 것이고, 그 법에 준거해 기구를 존속시킬 것이냐, 마느냐는 판단은 어디까지나 기업 스스로의 결정에 맡겨져야 할 문제다.

문어발 경영이라고 비판받는 경영의 다각화 문제도 과연 이런 식으로 강제할 일인지 의문이다.

전문화가 좋은지, 다각화가 좋은지는 학문적으로도 여전히 시빗거리다.

전문화로 실패한 기업이나 다각화로 성공한 기업 사례는 세계적으로 얼마든지 있다.

어느쪽을 택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기업이 결정할 문제다.

빅딜도 마찬가지다.

어디까지나 당사자들끼리 기업생존의 차원에서 타협을 일궈낼 상업적 거래다.

굳이 거중조정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정치권이나 정부관료가 아니라 돈 대주는 은행의 몫이다.

지난 80년, 그 막강했던 국보위가 힘으로 밀어붙였던 중화학 구조조정도 결국 실패로 끝났었다.

궁극적으로 기업이 무슨 장사를 하든, 어떤 스타일로 경영을 하든, 정부가 강제할 바 아니다.

정작 정부가 할 일은 따로 있다.

정부가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일은 최소한의 원칙을 정하고 그것을 철저히 챙기는 것이다.

웬만한 것은 시장에 맡기고, 시간을 가지고 지켜보는 훈련부터 쌓아나가야 한다.

그게 바로 시장경제 창달의 핵심이다.

'네가 하면 관치 (官治) 요, 내가 하면 개혁' 이라는 식이 돼서는 설득력을 발휘할 수 없다.

'차렷, 열중쉬엇' 식의 경직된 개혁은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다.

이장규<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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