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민주주의와 경제발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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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김대중 대통령당선자가 '민주주의와 경제의 동시발전' 을 새 정부의 국정목표로 설정한 뒤 학계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상관관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한국의 경제발전이 박정희 (朴正熙) 의 독재에 의해 달성된 것이라는 여론이 IMF한파를 불러온 김영삼 (金泳三) 문민정부의 경제실패와 맞물려 증폭되는 가운데 金당선자는 '권위주의 = 경제발전, 민주주의 = 경제정체' 라는 등식이 틀렸다는 것을 자신의 정부가 실적으로 증명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상반된 이론적 주장이 공존하고 있다.

먼저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에 부정적이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민주주의하에서 정치인은 경제적 합리성보다 표를 더 많이 얻는데만 관심이 있다.

표를 얻기 위해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의 단기적이고 근시안적인 이익에 반응한다.

민주주의하에서 미래의 소득증가를 약속하면서 현재의 고통을 감수하자는 공약으로 당선될 정치인은 드물다.

민주화로 가난한 다수가 정치권력의 소재지를 결정할 힘을 보유하게 되자마자 그들은 과거 권위주의 독재에 의해 억눌려왔던 소비욕구를 충족시켜줄 것을 요구한다. 표를 가진 다수의 환심을 사려는 정치인들은 소비주의적 정책을 펴게 되고 경제발전을 위한 투자에 들어가야 할 자원을 소비로 돌리며, 다수의 재분배 요구에 대응해 세금 증대를 통한 소득이전을 추구한다.

그 결과는 국가의 팽창과 성장의 정체다.

반면 권위주의에서 자신의 권력을 표에 의존하지 않는 독재자는 민중들의 즉각적 소비욕구를 억압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경제발전이라는 보편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에 긍정적이라는 주장은 독재자가 경제발전이라는 보편적 이익을 추구한다는 가정을 거부한다.

대부분의 경우 통제를 받지 않는 독재자는 사회의 보편적 이익을 위해 헌신하기보다 자기 자신의 사익을 추구한다.

이에 반해 민주주의하에서 권력을 장악하려는 정치인은 시민들의 표를 극대화해야 하고, 표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가장 원하는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따라서 이상적 민주주의하에서 정부는 시민의 완벽한 대리인이 되며, 시민들이 사실상 정부의 활동을 결정하게 된다.

시민들이 정부활동의 수준을 결정하게 될 때 시민들은 정부활동에 드는 비용을 초과하는 세입을 거두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고, 정부활동은 최적으로 공급되며 정부활동으로 인한 낭비는 없어진다.

위의 이론적 논의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관계가 양면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의 경제위기를 가져온 과소비는 민주화 이후 표를 가진 유권자들의 근시안적 요구에 정치인들이 반응한데서 초래됐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시민들이 자신의 정부를 통제할 수 있는 민주주의하에서 정부로 하여금 시민들의 복지를 극대화하게끔 강제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시민들이 표의 회초리를 통해 정부를 통제하고 있을 때 정치인.관료.기업이 담합과 공모를 통해 시민들의 복지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결국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을 촉진할 것인가, 저해할 것인가는 주권자인 국민에게 달려 있다.

민주주의하에서 주권자인 국민이 근시안적이면 정치인도 근시안적이 된다.

그 결과는 즉각적 재분배의 추구로 인한 경제의 정체다.

반면 정부가 국민의 집단적 이익을 위해 일하도록 효과적으로 통제되고 있을 때 효율적인 정부가 실현되며, 정부의 낭비는 없어지고 경제발전에 긍정적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金당선자가 '민주주의와 경제의 동시발전' 을 추구한다면 국민의 근시안적 요구에 즉각적으로 반응해서는 안될 것이다.

민주주의가 민중주의 (Populism) 로 흘러갈 때 경제구조 조정은 어렵게 된다.

단임 대통령으로서 재선을 추구해야 하는 제약을 받지 않을 金당선자는 민중주의 정치의 유혹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다.

金당선자가 국민과의 부단한 대화와 협의를 통해 위기의 한국사회가 추구해야 할 일반의사를 확인하고 이를 국민들의 동의하에 추진해 나간다면 민주주의의 공고화와 경제의 복구를 동시에 달성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임혁백 〈이화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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