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달러가 더 이상 기축통화일 필요 없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6면

경희대 주최 세계시민포럼에 참석하러 서울에 온 폴 케네디 교수를 어렵게 만났다. 그는 세계적인 역사학자지만 경제를 정치의 하부구조로 보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동조해 경제적인 부(富)의 흐름에서 정치질서의 향방을 짚어내는 긴 눈의 분석은 인상적이었다.


 김영희=최근 신문 기고에서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의 지위가 국제환경 변화에 맞춰 달라져야 한다고 하면서 정치·경제·사회의 표면 아래의 지각판, 마르크스가 말한 하부 구조가 미국과 서유럽에서 성공한 나라들로 이동한다고 지적했는데 어떤 나라들을 말합니까.

폴 케네디=수출 규모와 포춘 500대 회사, 은행, 석유회사의 크기로 보면 중국·일본·러시아·인도를 들 수 있어요. 경제적 권력 이동은 제조업에서 먼저 일어나고 준비통화나 금융 서비스 분야는 한 걸음 뒤떨어져 이동해요. 영국이 1900년대 제조업의 우위를 미국과 독일에 내준 뒤에도 30~35년간 파운드와 금융 서비스의 우위를 지킨 게 그런 경우죠. 그러나 저변에서는 지각판의 이동이 일어나고 있었어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달러가 유일한 기축통화의 지위를 누려 왔지만 새로 수출 국가로 부상해 거대한 부를 축적한 나라들이 달러 보유에 불편을 느끼면서 상황이 바뀌고 있는 겁니다. 이건 세기마다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그러나 미국의 어느 대통령이 감히 달러의 위상 약화를 감수할까요.

케네디=오바마는 할 수 있어요. 그는 미국 달러가 세계 유일의 기축통화 역할을 계속하는 것은 미국인들에게 부담이 되고, 다른 나라들이 가진 미국 국채가 달러 가치를 좌우할 때 미국은 속수무책이라는 점을 미국인들에게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기축통화의 다변화는 미국에도 좋아요.

=오바마가 정치적 부담을 안고 과연 그런 결단을 내릴까요.

케네디=그렇게 갈 겁니다. 올여름부터 각국의 달러 보유액이 줄 것으로 보이는데 당황할 것 없어요. 특히 중국과 일본, 한국같이 달러를 많이 가진 나라들이 달러를 추가로 매입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 나라들의 수출 흑자 폭이 예전처럼 크지 않기 때문에 달러 보유액이 급작스럽게 줄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미국 수출 산업에는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오바마는 달러의 적정 가치에 대해 말을 아껴 야 해요. 투자자들은 양과 같아서 자그마한 자극에도 이리저리 몰려다녀요. 아무 말 하지 않는 게 달러 가치 고수에 이롭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 금융질서인 브레턴우즈 체제 아래서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유럽인, 세계은행 총재는 미국인으로 고정됐는데 중국이나 인도, 브라질의 분담금이 늘면 두 기구의 수장 자리가 아시아로 돌아올 수도 있나요.

케네디=제2차 세계대전 후 금융·안보를 위해 국제 금융기관이 필요하다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아이디어로 IMF와 세계은행이 생겼는데 두 기구의 수장과 요직은 그때의 경제력을 반영해 유럽과 미국인이 차지할 수밖에 없었어요. 앞으로 중국의 경제 규모를 반영하는 쪽으로 바뀌겠지만 유럽과 미국이 순순히 그 자리를 내놓을지는 알 수 없어요.

=한·중·일 3국 재무장관들이 최근 아시아통화기금(AMF) 창설에 관한 논의에서 큰 진전을 봤습니다. AMF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케네디=미얀마나 필리핀의 재무장관이라면 AMF를 환영하겠죠. 급하게 구제금융을 받아야 할 때 IMF에 가서 다른 지역 국가들과 경쟁하지 않고 쉽게 지원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AMF는 IMF의 설립 취지와는 어긋납니다. IMF는 일부 국가의 경제가 어렵고 다른 국가의 경제가 잘되고 있을 때 균형을 맞추자는 취지로 생겼습니다. AMF는 아시아 국가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는 것이어서 글로벌 차원의 균형을 맞추자는 IMF 정신을 상당히 퇴색시키는 겁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국력은 막강해지는 반면 민주주의나 인권 수준은 서방의 기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미국과 서유럽이 중국이나 러시아와 우호·협력 관계를 위해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이라는 이상과 두 나라의 국제적인 영향력이라는 현실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습니까.

케네디=나는 친구인 헨리 키신저와 그 문제를 자주 이야기하는데 그는 현실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이상주의자죠. 그래서 중국 정부나 러시아의 푸틴도 키신저와 대화하는걸 좋아해요. 그는 인권과 민주주의의 점진적인(Gradual) 발전을 믿어요. 지금 당장 완전히 투명한 수준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게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무역과 아이디어의 교류, 대화를 통해 단계적으로 접근하면 그 나라의 인권과 민주주의도 점진적으로 보편적인 국제 기준에 도달한다는 거죠. 오바마는 그를 지지한 인권주의자들로부터 국제 관계에서 원칙과 도덕성을 앞세우라는 압력을 받고 있지만 중용의 위치를 잘 찾아야 합니다. 그건 이상주의자들을 만족시킬 수 없는 수준입니다. 러시아와 중국 정부가 똑똑하다면 오바마가 그들에게 망신을 주지 않기 위해 애를 많이 쓴다는 걸 알 것입니다.

=키신저의 점진주의(Gradualism)가 북한에도 적용됩니까.

케네디=키신저는 북한은 역사적 전례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예외적인 나라라고 말했어요. 키신저가 신봉하는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는 상대가 이성적으로 행동한다는 걸 전제로 하는 것인데 북한은 그런 이성적인 상대가 아니지 않습니까.

=오바마 정부는 그런 북한을 어떻게 다뤄야 합니까.

케네디= 창의적이거나 과감한 제안을 새롭게 내놓지 않을 겁니다. 북한을 다자회담에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계속하겠지만 과민하게 북한을 몰아붙여선 안 됩니다. 오바마 행정부가 현명하다면 라틴어 ‘페스티나 렌테(festina lente:바쁠수록 돌아가라)’를 모토로 삼을 겁니다.

=금융위기가 진정되면 국가개입주의적 자유주의가 자유방임적 신자유주의를 대체하게 됩니까.

케네디=지금은 루스벨트 때보다 더한 정부 개입이 이뤄지고 있어요. 공화당의 종교·외교 정책에 대한 실망이 너무 컸던 것에 대한 반작용이죠. 거기에 금융 스캔들과 정부 지원을 요청한 월가의 문제가 뒤섞여 시계추가 자유시장주의와는 반대 방향으로 완전히 기울었습니다. 미국의 재정적자 규모를 볼 때 오바마가 공약한 교육과 의료보험 개혁을 실행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의회는 과거와는 완전히 반대로 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정리=최지영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폴 케네디는=1945년 영국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독일 본대학과 훔볼트재단을 거쳐 지금은 예일대학 역사학과 석좌교수. 경희대 해외석좌교수이기도 하다. 그의 저서 『강대국의 흥망』(1988)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