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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홍 실전보, 묘수풀이 담긴 한국 최고 추정 기보집 발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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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세계 최초의 기보(棋譜)는 중국 삼국시대 강동의 패자였던 손책(AD 175~200)과 그의 막료 여범의 대국을 기록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800여 년 전의 것이다. 일본엔 1200년대의 기보가 있고, 1600년 무렵 탄생한 본인방가(本人坊家)의 대국보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한국은 1913년 육당 최남선이 중국 원나라 때의 현현기경을 수록한 ‘기보’라는 책이 바둑돌이 들어 있는 최초의 문헌으로 알려져 왔다. 또 한국인의 기보로는 구한말의 풍운아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해 본인방 슈에이(秀榮)와 6점을 놓고 대국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바둑 대국을 기록해 둔 기보집들. 재야 사학자 이청씨가 발견한 것으로 18~19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실전보(左)는 연한 붉은 색과 푸른 색 물감으로 흑백을 표시했고 그 안에 한문으로 숫자를 써 넣었다. 다른 한 권(右)엔 기보 작성법, 묘수풀이가 기록돼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조문규 기자]

재야 바둑사학자인 이청씨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18~19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기보’ 두 권을 찾아냈다. 모두 필사본인데 한 권은 작자 미상이고 일절 설명 없이 실전보와 묘수풀이만 수록돼 있는 책이다. 실전보는 연한 붉은 색과 푸른 색 물감으로 흑백을 표시했고, 그 안에 한문으로 오늘날의 기보처럼 숫자를 써넣었다. 다른 한 권엔 바둑의 의미와 기보 작성법, 바둑용어 풀이, 그리고 현현기경 소개와 묘수풀이들로 꾸며져 있다. 송나라 때부터 전해지는 위기십결(圍棋十訣)을 혁가십결(奕家十訣)이란 독특한 제목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이청씨는 “조선 후기 바둑은 저 높은 궁궐에서부터 바닷가의 염전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대유행이었다. 지성인들 사이에서 바둑에 대한 찬반 논쟁도 폭발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보가 없어 아쉬웠는데 이번에 기록으로만 전하던 기보집을 찾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기보집이 18~19세기 것이라는 건 아직 추정일 뿐이다. 장서각 측에선 “과거 민간에서 구입한 것이다. 서지학자에 의뢰해 정확한 연대를 밝혀보겠다”고 말한다.

만약에 이 책이 18~19세기 것이라면 당연히 한국 최초의 기보집이 될 것이다.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 책자에 수록된 기보는 순장바둑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보에 순장바둑을 표시하는 17개의 장점이 없다. 이청씨는 “그동안 조선실록이나 각종 문헌들에서 우리 바둑이 순장바둑이란 사실을 유출할 만한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이번에 발견된 기보를 보면 순장바둑이 우리 고유의 바둑이란 종래의 통설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구한말과 일제시대 우리 국수들의 기보는 모두 순장바둑으로 돼 있다. 이 때문에 대국 전에 17개의 돌을 미리 놓고 출발하는 순장바둑이 고대로부터 내려온 한국 고유의 스타일이며 지금의 바둑은 일제 이후에야 한국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신라인이 중국 황실의 기대조(바둑 사범)를 할 정도로 한·중 간의 바둑 소통이 꾸준했는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순장바둑을 두었을까 하는 의심은 끊이지 않았고 순장바둑에 대한 기록도 찾을 수 없었다. 명지대 바둑학과 정수현 교수는 “ 확인해 봐야겠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순장바둑에 대한 의문도 이 기회에 풀릴 수 있을지 기대된다”고 말했다.

박치문 전문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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