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자기무덤파는 일본 금융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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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요즘 일본 매스컴에는 외국전문가들의 의견이 두드러지게 다뤄지고 있다.

국제경제뿐만 아니라 엔화 환율이나 도쿄 (東京) 의 주가 전망조차 시티은행이나 골드먼 삭스 등 외국계 금융기관에 묻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 금융기관들도 알기는 다 안다.

그런데 그들은 대장성의 눈치를 보느라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는 것이다.

접대 스캔들로 대장성이 공적 (公敵) 1호로 난타당하고 있지만 “말 한마디 잘못해 쓸데없이 화를 부를 필요는 없다” 는 금융기관의 몸사리기는 여전하다.

외국계 금융기관들은 거리낌없이 자기 의견을 내놓고, 심한 경우는 시장흐름조차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도쿄시장에서 '정보 생산자' 의 위치를 확실하게 다지고 있는 것이다.

또 일본 예금자들은 기존 거래선에서 이탈, 외국계 금융기관으로 몰려들고 있다.

시티은행 지점들은 미리 준비한 통장이 모자라 신규고객을 돌려보내고 있을 정도다.

한국 금융계도 서울.제일은행이 외국계자본에 매각되면 지각변동이 불가피하다.

당장 뒤가 구린 뭉칫돈이 금융실명제 보호가 보다 확실한 외국계 은행들로 몰릴 게 뻔하다.

이들이 '국제기준' 대로 적자점포를 폐쇄하고 부실대출선을 가차없이 끊겠다고 나서면 근근이 버텨온 기업들조차 줄도산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도 한국 금융기관들은 채권을 회수하고 종업원을 줄이려고만 할 뿐 흡수합병 등 적극적인 구조개혁 움직임은 없다.

지금은 폐쇄나 매각대상에 들지않기 위해 IMF나 재경원의 눈치만 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만신창이였던 일본채권신용은행은 대장성의 반대를 무릅쓰고 외국자본과 극적으로 제휴, 시장의 신뢰를 회복함으로써 기사회생했다는 점을 되새겨 봐야 할 때다.

이철호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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