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2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그러나 변씨의 주저없는 발걸음으로 보아선 이미 겨냥하고 있는 단골 숙소가 있는 눈치였다.

촘촘하게 들어선 민가들과는 거리를 두고 외따로 떨어진 말쑥한 민가 앞에서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었다.

대문 안으로 바라보이는 마당 여기저기에는 아직도 치우다만 폐자재들이 흩어져 있는 신축 한옥이었다.

불 켜진 방을 향해 누구 없느냐고 소리지르자, 금방 마루의 유리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오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낙네가 얼굴을 내밀었다.

변씨와 아낙네는 서로가 소스라쳐 인사를 나누었다.

변씨는 여인네의 양해도 없이 철규에게 건넌방을 가리켰다.

그런 다음에도 변씨와 아낙네는 오랜만에 만난 넋두리를 하느라고 건넌방에는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한저녁에 급하게 장만한 술과 밥을 먹는 좌석에서야 이 집에서 혼자 살고 있는 아낙네는 변씨의 먼 친척이라는 것을 알았다.

전등빛도 희미한 호젓한 방 안에 마주 앉아 망각을 위해 마셨던 유탕 (遊蕩) 의 술이 폭음으로 끝났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억병으로 취해 잠자리에 들었던 한철규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새벽3시가 가까워올 무렵이었다.

잠결에서나마 사추리에 느껴지는 촉감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목구멍이 옥죄고 드는 듯한 갈증으로 명치를 움켜쥐며 상반신을 일으킨 그는 무의식적으로 곁에 누워 있던 사람을 흔들었다.

그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발딱 깨어나 이불깃 밖으로 잔허리를 뽑아올렸다.

그리고 베갯머리에 놓았던 자리끼를 더듬어 그의 입언저리에 디밀었다.

냉수를 들이켜고난 다음에야 그는 경계선 밖으로 까마득하게 밀려났던 의식의 끝자락을 잡아챌 수 있었다.

곁에 누워 있는 사람이 난데 없는 여자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 자신도 여자와 같이 실오라기 하나 걸친 것이 없는 전라의 몸이란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갈증이 가라앉은 가슴 속으로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그때였다.

불쑥 올라온 여자의 한 손이 일순 허공을 헤집다가 그의 견대팔을 단호하게 잡아채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 공격적인 행동을 매몰차게 뿌리칠 엄두도 못하는 사이에 그의 발가벗은 몸뚱이는 다시 이불 속으로 묻혀버렸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몽환적 분위기는 간 데 없고, 시큼한 역기를 동반한 단내가 어둡고 협소한 이불 속에 꽉 들어차 호흡조차 곤란할 지경이었다.

그는 다시 이불자락을 걷어붙이며 심호흡을 하였다.

“그만 주무세요. 세 시도 안됐어요.” 짜증과 다독거림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 여자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는 얼굴을 다시 이불 속으로 묻었다.

여자가 이불자락을 끌어당겨 그의 목덜미를 덮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자의 도발적인 행동은 그것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서로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뚱이라는 것을 그에게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손바닥으로 그의 불두덩을 가볍게 더듬기 시작했다.

소스라친 그는 여자의 손을 잡아 가만히 내치었다.

내치던 손을 다시 거둬들이는 찰나,치다꺼리가 잘된 밀가루 반죽같은 말랑말랑한 살갗이 손등으로 스쳐갔다.

섬뜩하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충동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자존심을 손상당한 여자는 한동안 미동도 않고 누워 있었다.

철규의 뇌리로, 발가벗은 여체가 천장을 바라보며 다듬이돌처럼 반듯하게 누워있는 모습이 그림자처럼 스쳐갔다.

그러나 더듬이같이 세련되고 가벼운 여자의 손은 다시 그의 가슴 위로 기어올라와 나비처럼 능숙하게 내려앉았다.

응석의 여운이 진하게 묻어나는 몸짓이었다.

어떤 여자일까. 그들 두 사람에게 방을 내준 민박집의 아낙네는 아니라는 확신이 들고부터 그것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철규는 끝내 곁의 여자에게 얼굴을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성적 충동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실망은 당하고 싶지 않다는 미묘한 감정 때문이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