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보수·진보 소모적 논쟁 끝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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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중앙일보가 지난달 게재한 '진보랑 보수랑'시리즈는 이념을 둘러싼 소모적인 논쟁을 생산적 흐름으로 바꿔 알기 쉽게 정리한 유익한 기사였다. 기사가 지적한 대로 과거 독재정권 밑에서 '진보'는 금기의 용어였다. 하지만 오늘의 정치 상황은 분명히 개선돼 이제 진보는 보수의 대립 개념으로 당당히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 개념들을 적절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사용하는 경우도 흔하다. 우선, 특정인을 쉽게 진보나 보수로 단정한다. 사람은 진보나 보수적 외양과 취향을 타고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일관된 이념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북곽 선생과 같이 보수적 유학자이면서도 남녀상열지사에서는 진보적인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밖에서는 양성 평등을 강력히 주장하지만, 집에서는 엄격한 남성 우월주의자인 사람도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사안에 따라 진보와 보수를 넘나들고 있다.

보수와 진보는 공적 영역에서도 문제를 낳는다. 이념은 정책 정향(policy orientation)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가 국내외 모든 정책에 일관된 이념성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가까운 예로 김대중 정부를 보더라도, 이 정부가 시종일관 진보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정부가 지향했던 것은 '작지만 강한 정부'였기 때문이다. 물론 작은 정부를 복지정책을 축소하는 정부가 아니라, 효율적으로 절약하는 정부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조세가 차지하는 비율이 20% 내외에 머물고 있는 우리나라는 전형적인 작은 정부 국가이다. 김대중 정부는 남북 관계 정책에서 진보적이었고 그 기조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김정일 체제는 북한 쪽에서 보면 보수, 그것도 철저한 보수다. 진보적인 우리 정부가 친화하려는 상대가 철저한 보수라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한 이라크 파병은 어떤가. 국내외 정책 정향을 일관되게 유지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경계를 넘나들게 되고, 우리는 헷갈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를 대립적인 개념으로만 파악하는 데서도 문제가 일어난다. 사람의 일생은 진보나 보수의 외길만은 아니며, 정부도 진보나 보수의 한 축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늘의 진보가 내일의 보수로 바뀌는 일을 적지 않게 보아 왔다.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레닌이 주고받았다던 농담이 있다. 레닌이 저우언라이에게 "당신은 자본주의자를 배반했지요"라는 뼈있는 농담을 건넸다. 그가 자본가 출신임을 넌지시 꼬집은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노동자와 농민을 배반했지요"라고 받았다. 그들을 잘살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비판한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노동자와 농민을 잘살게 하기 위해 자본주의를 배척했다가 다시 그들을 위해 자본주의로 회귀한다. 진보에서 보수로, 그리고 보수에서 진보로 전향을 거듭한 셈이다.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이 과정에서 참정권을 가진 국민은 국가의 정책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또한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정책을 깊이 이해할수록 국민은 선거에서 올바른 한 표를 행사하게 되고, 정치인과 정당은 더 나은 정책을 개발하려고 노력하게 되며, 그럼으로써 정치 과정의 진화가 촉진된다. 그러나 논쟁에서 진보와 보수를 옳고 그름, 더 나아가 선과 악으로 여기는 일은 피해야 한다. 이 야만적 동일시는 서로 성향이 다른 국민 사이에 적대감만 조성할 뿐 조금의 실익도 가져오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지금 경제나 국제관계에서 매우 우려할 만한 처지에 놓여 있다. 정치 지도자들에게 진보.보수를 옳고 그름, 선과 악의 틀에 가둬 한쪽을 매도하고 고립시킬 겨를을 허용하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균형감각을 가지고 미래 지향의 정책을 세워 이를 성실하게 추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대다수 국민의 바람일 것이다.

정정목 청주대 교수.행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