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블랙홀, 커피③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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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블랙홀, 커피③

세포 깨우는 은은한 향기, 아침방송 '성공예감'

방송 스튜디오에서 나와 첫 대면을 하는 사람들은 한번씩 크게 놀라곤한다. 마이크 앞에 놓인 두 개의 컵 때문이다. 그것도 생맥주 잔에 필적할만한 크기다. 맞은 편에서 컵을 유심히 보던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묻는다. “도대체 뭘 그렇게 드시는 겁니까?”그 컵을 마련하기까지의 복잡한 과정을 방송 틈새 시간동안 말하긴 힘들다. 그저 ‘커피예요’라고 답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 개의 컵은 각각커피와 물이다. 커피와 물이 가득 준비되어 있어야 방송이 제대로 된다.일종의 징크스다. 커피는 내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일깨우고 안정감을주는 각성제요, 안정제다. 물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 준비한
다. 커피를 너무 들이켜 목이 타거나 속이 쓰릴 때를 대비하는 보조제다.
 
가끔 커피와 물을 준비하는 것을 잊을 때도 있긴 하다. 그럴 때면 십중팔구 안절부절 못한 채 방송을 망치고 만다. 방송을 할 때만이 아니다.칼럼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커피가 있어야 글이 술술 풀린다.커피에 대한 방송인의 태도는 대개 둘로 나뉜다. 나처럼 커피 없이는방송이 안 된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가 하면 커피를 극도로 꺼리는사람들도 많다. 커피를 마시면 입 안에 침이 고여 제대로 발음을 하기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그런 경우, 방송 중에는 물론이고 방송을 앞두고도커피라면 질색한다.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설탕이 듬뿍 들어간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방송에 들어갔는데, 침을 삼키느라 말을 온전하게 잇기가 힘들었다. 침삼키는 소리가 전파를 탈까봐 잇달아 ‘기침 버튼(cough button: 마이크를 잠시 끄는 기능을 하는 버튼)’을 눌러댄 탓에 방송은 툭툭 흐름이 끊기기 일쑤, 방송 사고를 연발한 격이 됐다.그 때부터 자판기 커피 대신 내려 마시는 드립 커피나 에스프레소에물을 탄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호사를 본의 아니게 누리게 됐다. 문제는시간이었다. 방송국 안팎의 커피숍은 대개 아침 8시에 문을 연다. 8시35분에 시작되는 방송을 진행하는 입장에서 그 시각은 일종의 블랙홀이다.

오프닝을 쓰고, 큐시트(Q-sheet)을 보며 프로그램의 전체 윤곽을 익혀야한다. 여기다 인터넷으로 경제·경영 뉴스 속보를 들여다보노라면 시간의경계는 아예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 시각에 줄이 늘어선 커피숍을 들러커피를 사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방법은 하나, 집에서 가져오는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커피를 준비하기위해 30분 이상의 아침잠을 포기해야했다. 술자리가 많아 아침이 힘겨운내게 그 일은 큰 고역이었다. 가격이 만만찮은 에스프레소 머신도 들여놔야 했고, 복잡한 커피 제조법도 익혀야 했다. 두 개의 컵에 커피와 물을준비하기까지는 그렇게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라디오 스튜디오에서나와 마주친 사람들은 대개 내 커피를 부러워한다. 슬며시 작은 종이컵을 내밀어 나누어줄 것을 청하는 이도 있다. 스튜디오 입구에 ‘온 에어’불이 들어오고, 프로그램 타이틀이나 코너 타이틀이 나가는 짧은 시간동안, “자, 커피요”라며 조심스럽게 이루어지는 나의 ‘커피 서비스’는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커피를 받아 든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그저 미소를 건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컵을 들어 고마움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컵을 가볍게부딪쳐 건배를 하는 이는 내 모닝 커피 서비스에 익숙한 사람이다. 이렇듯 이른 아침, 방송과 함께 하는 모닝 커피는 음료 이상의 의미가 있다.내게 커피는 각성제요, 안정제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질긴 끈인 것이다.

김방희(생활경제연구소장·KBS1라디오 <성공예감> 진행자)

=자료제공 KRU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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