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같은 현실을 보고도, 소현과 봉림 두 형제의 꿈은 달랐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12호 32면

명나라의 마지막 장수 오삼계가 지키던 산해관.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산해관까지 가서 명군이 청군에게 항복하는 장면을 목도했다. 사진가 권태균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뿐 아니라 봉림대군(효종)도 인질로 끌려가는 것이 강화 조건 중 하나였다. 강화도에서 나온 봉림대군은 남한산성 아래서 인조를 잠깐 뵙고 소현세자와 함께 인질 길에 올라야 했다. 19세의 봉림대군은 압록강 건너 만주 땅 청석령(靑石嶺)에 올랐다. 숙종 때 사신으로 이 고개에 올랐던 이의현(李宜顯)은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에서 “길이 좁고 험한데 돌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고 적고 있다. 청석령 고개에서 봉림대군은 시조를 토해 냈다. “청석령 지나거다 초하구(草河衢) 어디메뇨. 호풍(胡風)도 차도찰샤 궂은비는 무슨 일고. 뉘라서 내 행색(行色) 그려내어 임 계신데 들이리.”(『가곡원류(歌曲源流)』)

국란을 겪은 임금들 효종① 三宗의 혈맥

이 재를 넘어 심양(瀋陽)으로 들어가면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지가 불투명했다. 인질 생활 동안 봉림대군은 소현세자 못지않게 고생했다. ‘효종대왕 묘지문’은 그가 청나라 군사들과 “서쪽 몽고 경계에 갔고, 남쪽 산해관에 갔으며, 더 남쪽 금주위(錦州衛)의 송산보(松山堡)에 이르러 (명나라) 제장(諸將)들이 패배해 항복하는 것을 보았다”고 적고 있다. 소현세자와 함께 명나라의 몰락 장면을 목도하면서도 바라보는 관점이 전혀 달랐던 게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 놓았다. 소현세자가 여진족(만주족)이 중원의 새로운 패자가 되는 현실을 인정했다면, 봉림대군은 그들을 꺾는 설치(雪恥)를 꿈꿨다.

그러나 봉림대군은 소현세자를 꺾고 임금이 되려 노력하지는 않았다. 효종의 5녀 숙정공주(淑靜公主)의 남편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이 쓴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에는 효종이 훗날 아들(현종)에게 “내가 형님과 심양에 인질로 잡혀 있을 때 신민(臣民)들이 내게 어진 덕이 있다고 오인하여 마음으로 따랐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 발언이 심양관 내에 소현세자의 노선을 반대하는 세력이 형성되었다는 뜻인지, 인조가 소현세자를 제거하려 함을 안 심양관의 일부 세력이 봉림대군에게 미리 선을 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봉림대군이 스스로 만든 세력은 아니었다. 소현세자가 제거된다 해도 원손(元孫)으로 불리던 장남 석철이 있었다. 장남이 부친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을 경우 차남이 아니라 장손이 뒤를 잇는 것이 조선의 종법이었다.

하지만 9년간의 인질 생활 끝에 인조 23년(1645) 귀국한 소현세자가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임을 당한 상황에서 인조가 원손 석철 대신 봉림대군을 후사로 점 찍으면서 운명은 달라졌다. 소현세자가 급서한 날은 인조 23년 4월 26일, 인조가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기로 작정한 날은 윤6월 2일이었다. 이때 인조는 원손을 세워야 한다는 많은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청나라 사신이 오면 반드시 국본(國本:세자)을 물을 것이므로 급급하게 의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청 세조와 섭정왕 다이곤은 공부상서(工部尙書) 흥능(興能) 등을 소현세자 장례의 조제(弔祭) 사신으로 보냈는데, 이들의 도착 예정 날짜가 윤6월 4일이었다. 이들이 소현세자의 뒤를 원손 석철로 하여금 잇게 할 것을 요구하기 전에 봉림대군을 세자로 결정하려는 것이 인조의 생각이었다.

인조는 원손을 세워야 한다는 많은 대신의 반대를 물리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결정했다. 드디어 사신들이 도착한 윤6월 4일 조정에는 두 가지 움직임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하나는 봉림대군이 세자 책봉 사양 상소를 낸 것이다. 봉림대군은 “선세자(先世子:소현세자)가 오랫동안 동궁으로 있다가 이제 막 졸서(卒逝)했는데, 원손(석철)의 칭호는 온 나라 사람이 우러르는 바입니다”라면서 소현세자의 후사는 자신이 아니라 석철이라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러나 같은 상소에서 봉림대군은 “가슴에서 나오는 말을 이길 수 없어 성상의 위엄을 범하였으니 두려움이 이르는 것을 더욱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며 혹여 인조가 이 상소에 화를 내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도 드러냈다. 인조는 이렇게 비답했다.

심양시 아동도서관. 소현세자와 조선 인질 일행이 거처하던 심양관 구지(舊址)로 알려져 있다. 사진가 권태균

“상소를 살펴보고 너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너는 총명하고 효성과 우애가 있으며 국량도 좁지 않다. 그래서 특별히 ‘형이 죽으면 다음 아우가 뒤를 잇는 예절(兄亡弟及之禮)’을 썼으니 너는 사양하지 말고 더욱 효제(孝悌)의 도리를 닦아 형의 자식을 네가 낳은 자식처럼 보거라(視兄子猶己出).”(『인조실록』 23년 윤6월 4일 )

인조가 손자들에게는 일말의 애정이 남아 ‘형의 자식을 네가 낳은 자식처럼 보라’고 말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국왕 즉위 예정자가 즉위하지 못한 뒤 목숨을 보전하는 예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인조가 아니었다. 문제는 청나라 사신들의 태도였다. 같은 날 청나라 사신들은 청 세조의 조제문(弔祭文)을 전달했다.

“세자가 갑자기 서세(逝世)했다는 말을 듣고 깊이 놀라고 애도하였다. 세자가 북경에 있을 때 언동이 완연했던 것을 추상(追想)해 보니 더욱 통석(痛惜)을 느낀다…하루아침에 이 지경에 이를 줄을 어찌 헤아렸겠는가. 오호라, 가슴 아프다.”(『인조실록』 23년 윤6월 4일)

청 세조의 숙부인 섭정왕 다이곤도 치제문에서 “어찌 하늘이 착한 사람을 도움 없이 하루아침에 꺾어 버린다는 말입니까?”라고 애도했다. 그러나 청 사신들은 소현세자의 후사 문제에는 공개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인조실록』은 같은 날 통역관 정명수(鄭命壽)가 다른 신하들을 모두 나가게 한 후 인조와 사신 3명, 그리고 환관 두 명만 있는 자리에서 밀담을 나누었다고 전하고 있다. 사신이 나간 후 인조는 도승지 김광욱(金光煜)을 앞으로 가까이 나오게 한 후 “사신이 섭정왕의 뜻이라면서 ‘동방의 인심이 좋지 않은데, 이런 때 만일 어린 원손이 후사가 된다면 위태롭고 불안할까 염려됩니다’고 말하기에 내가 사실대로 고했더니 사신이 다 기뻐하면서 ‘국왕께서 이미 정한 계책이 있으니 동방의 다행입니다’고 기뻐했다”고 설명했다. 청나라 사신들이 봉림대군을 세운 것을 ‘동방의 행복’이라고 했다는 것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신들은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에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봉림대군으로서는 가장 큰 난제를 해결한 셈이었다.

그래서 봉림대군은 사흘 후인 윤6월 7일 “신이 어찌 감히 재주도 덕도 없는 몸으로 갑자기 세자의 자리를 담당하여…”라는 사양 상소를 다시 올렸으나 이번에는 원손 운운하는 구절조차 빠진 완전히 형식적인 사양 상소였다.

이렇게 봉림대군은 인조의 후사가 되었으나 문제는 원손 석철이었다. ‘형의 자식을 네가 낳은 자식처럼 보라’고 말했던 인조는 재위 25년(1647) 5월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그러자 병조 참지 정언황(丁彦璜)이 상소를 올려 ‘네가 낳은 자식처럼 보라’고 말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지금 이 세 아이를 동궁에게 맡게 시키시고 빈궁(嬪宮:세자빈)의 아들로 삼아서…어린아이들의 성명(性命)을 보전하게 하소서”(『인조실록』 25년 5월 14일)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인조 19년(1641)에 부인 장씨에게서 낳은 아들이 있는 봉림대군이 소현세자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을 수는 없었다. 후사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이 민감한 문제는 석철이 인조 26년(1648) 9월 18일 제주도에서 죽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이 기사를 전하면서 사관은 “이에 앞서 용골대(龍骨大)가 와서 석철을 데려다 기르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 그가 반드시 보전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고 쓴 것처럼 후사 자리를 빼앗긴 그의 죽음은 예견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아들과 손자까지 죽인 인조가 재위 27년(1649) 5월 8일 창덕궁 대조전 동침(東寢)에서 세상을 떠나고 봉림대군은 5월 13일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했다.

그는 광해군 11년(1619) 음력 5월 22일 해시(亥時:밤 9~11시)에 향교동(鄕校洞) 잠저(潛邸)에서 태어났는데 『효종행장』은 “이날 저녁 흰 기운(白氣) 세 가닥이 침실로 날아와 서쪽 창가에 엉키어 있었는데 연기와 비슷했으나 연기가 아니었다. 한참 후에 흩어졌는데 본 사람들이 다 기이하게 여겼다”고 전하고 있다. 날 때부터 왕기(王氣)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그가 국왕이 될 것으로 여긴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태어날 때 국왕이 될 확률이 거의 없었던 효종은 이렇게 삼종(三宗) 혈맥(血脈)의 시대를 열었다. 이때부터 조선 왕조는 효종-현종-숙종의 핏줄을 뜻하는 삼종의 혈맥이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의미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북벌군주 효종시대의 막이 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