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동남아와 한국의 차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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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해 여름 동남아시아의 금융위기가 시작될 때부터 당국자들은 "우리는 이들과 다르다" 고 줄곧 주장해 왔다.

그러나 동남아시아가 겪고 있는 문제의 감염속도가 워낙 빨라 한국과 이들을 구분해 낼 여유조차 없었다.

이제 와서 새삼 한국이 동남아시아와 차별화되고 있는 데는 인도네시아처럼 여전히 권위주의 통치 하에서 경제난을 맞고 있는 나라의 실책 (失策) 이 일조하고 있다.

인도네시아가 IMF의 요구사항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상황을 악화시키자 미국내 주요 언론들은 "정치민주화 없이 시장경제 운용에는 한계가 있다" 며 비난하고 나섰다.

국내 일각에선 여전히 지난해 정치일정 때문에 금융위기가 심화됐다는 주장이 있지만 민주적 선거절차를 마무리한 한국은 유사한 금융난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성숙도에서 동남아 국가들과 차별화되고 있다.

적어도 현재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당선자 주도로 추진되는 한국의 위기 극복 노력은 미국으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아시아의 가치' 를 앞세우며 바깥을 탓하는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나 싱가포르의 리콴유 (李光耀) 와 달리 '미국식 해법' 에 충실한 金당선자의 행보에 미국이 만족스러워 하는 것이다.

당선 직후 주한미군을 방문해 한.미안보동맹을 강조하고 또 재벌에 엄중한 충고를 하고 나선 제스처에도 환호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정작 현 아시아 사태를 보는 미국의 고민은 지도자 한 사람에 대한 기대를 넘어선다.

홍콩독감처럼 인도네시아의 금융위기가 떨치는 위세와 감염의 파장은 합리적 계산으론 대응하기 어렵다는 비관론이 일고 있다.

이들 국가로 하여금 금융개혁과 시장개방을 앞당기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이 합리적 처방인 줄 알면서도 미국 스스로 반미 (反美) 감정의 분출 가능성을 먼저 우려하고 나서는 형편이다.

더욱이 이번에 제기되는 반미감정은 막연한 것이 아니다.

이들 국가와 기업들에 방만하게 돈을 빌려준 미국 은행과 투자가들도 벌 받아야 마땅하다는 주장과 연관된 것이다.

자신의 잘못은 외면한 채 문제가 터지자 마지못해 구제에 나서는 양 탐욕스런 조건을 들고 나오는 미국 큰손들의 가증스런 태도가 위기 극복 과정에서 고통받을 '없는 자' 들의 반미감정을 부추길 것이라는 근거있는 예측이 미국을 곤혹스럽게 한다.

金당선자의 지도력이 뛰어나고 미국측의 요구를 수용할 준비가 돼 있다 할지라도 동남아시아로부터 확산되는 국내 반미감정의 감염을 과연 피할 수 있을 지 미국은 조심스레 지켜보고 있다.

길정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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