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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의원이란 걸 느끼게 해줘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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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그런 정 전 의원이 여의도로 복귀하겠다고 했다. 낙선의 굴레를 벗고 싶어 했다. 이 대통령으로선 말리기 어려웠다. 새삼 김영삼(YS)의 심정에 이해가 갔다. 1995년 그가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나서겠다고 하자 대통령인 YS가 직접 만류했다. “정원식씨가 나를 도와 선대위원장을 지냈는데 신세를 갚아야 한다. 정 후보를 도와 달라.”

지난 총선에서 정 전 의원은 박근혜란 벽에 가로막혔었다. 경선 직후 “모든 일을 잊어버리자”던 박 전 대표는 자기 사람들이 밀려난다고 여기는 순간 “나를 도운 게 죄인가요”라고 반발했다. 그러자 정 전 의원을 포함, 이 대통령을 도왔던 사람들이 쓴맛을 봤다. 29일 보선에서 정 전 의원이 또 졌다. 역시 박 전 대표의 벽에 막혔다. 이 대통령 또한 답답함을 느꼈을 법하다.

그랬다면 이 대통령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어느 날 누군가 나의 발목을 잡았고 나는 좌절했다. 한때 나는 그를 원망하고 증오했다. 그러나 나를 넘어뜨린 자는 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2002년 새해 첫날 아침 이 대통령이 쓴 글이다(『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 실제 그는 이후 절망에서 희망을 봤고, 꿈을 이뤘다. 이 대통령이 지난해 총선 당시 경선 후유증으로 고심하던 한 측근에게 했다는 말도 쓸모가 있겠다. “사람에게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 겉으로만 잘해선 안 통한다.”

진실로 이 대통령의 탓이다. 그가 친박을, 여당을 외면하는 사이에 여당은 나름의 생존법을 익혔다. 차기 공천권, 즉 ‘의원 배지’를 둘러싼 계파 갈등 말이다. 그러는 사이 170석의 여당은 무력해졌다.

이 대통령이 곁을 내주지 않으면 여권은 더한 소용돌이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이젠 여당 의원이란 걸 느끼게 해줘야 한다. 국정에 기여한다는 자부심 말이다. 이 대통령과 홍준표 원내대표 사이에 이런 문답이 오간 적이 있단다. “장관 한번 시켜주시오.” “그럼 배지 떼라.” “떼고 장관 한번 해보렵니다. 대한민국을 세탁하고 싶습니다.” 굳이 자리가 아니어도 좋을 거다. 뭔가 이바지한다는 느낌 자체가 소중할 수 있다. 이 대통령이 최근 동남아 10개국에 중진들을 보내기로 한 뒤 당의 분위기가 달라진 건만 봐도 그렇다. 이 대통령이 근래 인사파일을 뒤적이고 있다고 해서 하는 조언이다.

고정애 정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