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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8월의 크리스마스'등 시한부 인생 다룬 영화 개봉 러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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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저 문 너머엔 평화가 있지. 난 알아. 천국엔 눈물이 없다는 걸…' .어린 아들을 잃은 처연한 심정이 녹아내리는 에릭 클랩턴의 '천국에서의 눈물' (Tears in Heaven) 의 한 대목처럼, 죽음은 다른 세계를 향한, 넘나들 수 없는 '문' 이다.

그 문 너머엔 평화만 있는지 이승에서야 알 길이 없지만 여하간 죽음은 삶만큼이나 부조리하고 불가해한 '인간의 조건' 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 한계를 딛고 설 수 있는 것은 대개는 죽음이 불시에, 기습적으로 찾아오기 때문일 게다.

어쩌면 그러길 천만다행이다.

만약 그것이 기차 도착시각표처럼 시시각각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우리들 삶은 얼마나 초조하게 말라갈지…. 이런 점에서 '예고된 죽음' 을 사는 남성들을 다룬 최근 한국영화를 주목하면 어떨까. 우선은 롱런중인 '편지' 와 24일 개봉하는 한석규 주연의 '8월의 크리스마스' 가 그렇다.

지금 촬영 막바지인 최민수 주연의 '남자 이야기' 도 마찬가지. 지난해로 거슬러가면,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했던 '아버지' 와, 크게 주목받진 못했지만 '그는 나에게 지타를 아느냐고 물었다' 도 그런 추세에서 한 귀퉁이를 차지한 작품들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 는 '편지' 보다는 훨씬 절제되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관객들의 정서를 파고든다.

'편지' 와는 달리 '8월의 크리스마스' 에선 한석규가 어떤 불치의 병을 앓는지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전혀 밝혀지지 않는다.

그는 마치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업무를 인계하듯이, 담담하게 죽음을 접수하는 것이다.

예컨대 VTR 작동법을 모르는 아버지를 위해 백지에 검은 사인펜으로 ①전원을 켠다 ②비디오테이프를 넣는다 ③ 'play' 를 누른다 식으로 번호를 매겨 벽에 붙여 두는 것이다.

변변한 유언 한마디 남기지 않았지만 그 울림은 훨씬 깊고 통렬하다.

비유하자면 '편지' 가 '눈물' 이라는 반찬을 버무려 관객들의 입에 '떠밀어 넣는다' 면 '8월의 크리스마스' 는 여러가지 감정들을 밥상에 펼쳐놓고 관객들이 선택하도록 하는 쪽이다.

'남자 이야기' 는 조직 폭력배 리더격인 최민수가 몸이 점점 마비돼가는 환자로 등장한다.

결국 그는 외아들을 통해 재생을 꿈꾸게 되는데…. 도대체 왜 시한부 인생인가.

게다가 '러브 스토리' 에서처럼 여성주인공이 아니라 왜 남자가 불치의 병을 앓는 것인가.

남성들의 사회적인 위치가 약화되고 그로 인해 가부장제가 위기를 맞은 것과 연관시켜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뚝한 남자' 체제 유지를 위해 협박도 하고 간혹은 얼러맞추려고도 했지만 잘 먹혀들지 않자 최후수단으로 동정심에 호소하게 되었다고 보는 방식이다.

'내 눈앞의 섹스 그리고 영화' 를 쓴 정신과 의사 배종훈씨는 “남성들을 출구없는 무력한 상태로 몰아넣고 남성과 여성 모두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얻고자 하는 전략” 이라고 본다.

'시한부 삶을 사는 남성' 이라는 설정 자체가 작위적인 냄새가 강하지만, 여성들은 그런 남성들에 보호본능을 느끼고 반면 당사자인 남성들은 자기연민의 감정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배씨의 지적. “남자든 여자든 이성 (異性)에 대한 감정은 양가 (兩價) 적이다.

여성은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남성을 미워하면서도 동시에 사랑을 느끼고, 남성도 현대에 들어 훨씬 여성에 대해 의존적이고 동정을 받고 싶어하는 경향을 띠는 경우가 많다.”

남자가 더 많이 울었다는 얘기가 있는 걸 보면 이같은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다.

이런 분석은 어떨까. 물질적인 풍요만을 향해 치달아온 우리 사회가 내향적인 사회로 변모해가는 현상. '프로이트와 영화를 본다면' 이라는 책을 냈던 정신과 의사 김상준씨의 설명은 이렇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눈에 보이는 가치만을 숭배해 왔다.

돈이나 명예를 뻐기고 체면을 중시하는 생활태도가 지배한 만큼 모든 가치가 밖으로만 향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눈을 안으로 거둬들이기 시작한 것 같다.

융이 말했듯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어느 한쪽만 과도하게 발달하면 어느 시점에 이르러 공허해지고 지루해져 반대쪽을 찾게 된다.”

이제야 가치의 중심축을 내면 세계로 옮기고 있다는 지적인데 말은 다시 이렇게 이어진다.

“시한부 삶을 다룬 영화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죽음' 을 간접체험케 함으로써 자신을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바라보도록 한다.

즉 순수 결정 (結晶) 으로서의 삶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소위 'IMF시대' 는 강제적으로라도 내향화할 수밖에 없는 시기이다.

시한부 삶을 다룬 영화들은 이같은 사회 저변에 깔린 의식의 흐름과 맞아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는 일과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

따져보면 현실에서 그러한 처지에 있는 이들이 마주하고 있을 그 측량할 수 없는 엄중함에 비하면 건조한 분석틀에 끼워맞춘 이 보잘 것 없는 글쓰기는 가당치 않은 소행일지도 모르겠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작아지는가 말이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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