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몸살앓는 지구촌 한인들]2.주눅든 프랑스 교민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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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파리 생활 1년째인 鄭모 (35.여) 씨는 요즘 가급적 바깥 출입을 삼가고 있다.

외국인을 위한 프랑스어 동네 강좌에도 얼마 전부터 발길을 끊었다.

슈퍼마켓이나 시장에 갈 일이 있어도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가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1주일에 한 번꼴로 슈퍼마켓에 다녔지만 최근에는 2주에 한 번꼴로 줄였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연히 누가 손가락질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스스로 위축되는 기분이니까 그렇죠. " 상사 주재원인 남편과 함께 파리에 온 鄭씨는 최근 남편 회사동료의 부인들과 모인 자리에서 나눴던 얘기를 들려준다.

그들은 한국이 국제통화기금 (IMF) 구제금융을 받기 전만 해도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혹시 일본사람 아니냐" 고 프랑스 사람이 물으면 "일본이 아니라 한국에서 왔다" 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에는 자신이 없다고 털어놓는 사람들이 많다" 는 것이다.

상대편에서 한국 경제가 어떠하느니, 정치가 어떠하느니 얘기할까봐 아예 적당히 얼버무린다는 얘기다.

한국이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지 2개월.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에서 어느날 갑자기 '비렁뱅이 나라' 로 전락한 한국을 보는 유럽인들의 시선이 예전 같지 않다.

실추된 한국의 이미지 때문에 속을 앓는 한국 사람들이 느끼는 허탈감은 비즈니스를 하는 상사원들의 경우 더욱 심각하다.

아프리카 지역과 주로 거래해온 파리 주재 상사원 金모씨는 최근 아프리카를 방문했다.

한국 정부가 경제협력개발기금 (EDCF) 을 제공하는 대신 사업은 한국 기업에 맡기는 것으로 이미 결정돼 있었다.

그러나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현지에 갔던 金씨는 아프리카 국가의 홀대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달러가 없어 부도 위기에 몰린 나라가 무슨 EDCF 사업이냐. 공연히 쓸데없는 소리 말고 상황이 호전되면 다시 생각해 보자" 는 현지 고위관리의 면박에 더 이상 따질 기분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한국을 낮춰보기 시작한 유럽인들의 시각 때문에 한국 기업들이 보고 있는 피해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다.

파리에서 자동차 현지판매법인 사장을 맡고 있는 S씨의 증언. "IMF 지원을 받는 나라에서 만들어낸 차가 오죽하겠느냐며 당연히 값을 깎아줘야 할 게 아니냐고 따지는 손님들이 적지 않다.

환율 상승에 따라 가격 경쟁력이 높아졌음에도 땅에 떨어진 이미지 때문에 받고 있는 피해 역시 만만치 않다. " 하지만 기죽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많다.

S상사의 P모 대표는 "냉정히 따지면 경쟁력의 문제" 라면서 "스스로 위축감을 느끼는 게 오히려 더 큰 문제" 라고 주장했다.

이럴 때일수록 당당하게 경쟁력으로 승부를 건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에 대한 이미지 때문에 은행거래 등 금융부문에서 특히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러나 자격지심 때문에 할 수 있는 일까지 못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된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한국이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을 일시적인 것으로 보고 있으니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 한국을 이솝 우화 (寓話)에 나오는 '소가 되고 싶어한 개구리' 로 비유했던 프랑스 르 피가로지의 P모 국장이 한국 친구들에게 전하는 따뜻한 충고다.

파리 = 배명복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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