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A·선트러스트 등 5개 금융회사 불합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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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호 28면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미국 정부가 19개 대형 금융회사에 대한 ‘스트레스(자본충실도) 테스트’를 마치고 24일(현지시간) 개별 금융회사에 통보했다. 학생들이 성적표를 받아 든 분위기다. 그들의 개별 성적은 공개되지 않았다. 다음달 4일 발표된다.

미 은행, 스트레스 테스트 해보니

그러나 정보가 새는 구멍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과 CNN 등은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정보원 입을 빌려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금융회사를 보도했다. 이 보도를 바탕으로 모자이크를 만들어보면 꼴찌 그룹이 나타난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씨티그룹·선트러스트(Sun Trust)·리전스파이낸셜(Regions Financial)·키콥(Keycorp) 등 다섯 곳이다. 이른바 머니센터(월스트리트) 금융회사 두 곳과 대형 지방 금융회사 세 곳이다. 선트러스트는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본거지를 둔 미국 12위(자산규모) 금융그룹이다. 리전스파이낸셜은 앨라배마 버밍엄에 자리 잡고 있는 미 16위 금융회사고, 키콥은 오하이오 클리블랜드에 있는 19위 금융회사다.

꼴찌 그룹은 경제성장률(GDP) 급감, 실업률 급증, 집값 폭락 등 ‘스트레스를 유발할 사건’이 발생했을 때 많은 자산이 부실해질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추가로 자본을 유치해야 한다. 반면 나머지 14개 금융회사는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옥석이 일단 가려진 셈이다.

시장은 테스트 결과를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뉴욕 주가는 1.5% 정도 올랐다. 자동차회사 포드와 카드회사 아멕스 등이 기대 이상의 올 1분기 실적을 내놓은 게 큰 힘이 됐지만 ‘금융회사 대부분이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점도 이날 주가 상승에 한몫 거들었다.

美 정부, 24일 각 은행에 결과 통보
전문가들의 반응은 시장과 달랐다. 테스트를 주관한 FRB가 이날 기준을 공개하자마자 비판이 봇물을 이뤘다. 그들은 “(기준이) 스트레스를 줄 만했는가(Is Stress test stressful)?”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FRB는 두 가지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금융회사들을 평가했다. ‘기본 시나리오’와 ‘나쁜 시나리오’다. 이 가운데 나쁜 쪽은 성장률이 올해 -2~-3.3%까지 떨어진 뒤 내년에는 0.5~2.1%까지 회복한다는 시나리오다. 여기에다 실업률과 집값 변수를 더했다. FRB는 실업률이 올해 8.8%, 내년에 10.3%에 이를 것으로 가정했다. 집값은 올해 22%, 내년에 7% 떨어질 것으로 추정했다. 이렇게 경제 사정이 나빠져 주택담보 대출과 신용카드, 할부 금융, 기업 대출 등이 부실화할 때 금융회사 손실이 얼마나 발생하는지를 FRB는 살폈다.

미 브루킹스연구소의 금융담당 선임연구원인 더글러스 엘리어트는 “FRB가 상당히 좋지 않은 상황을 가정하기는 했지만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지는 않았다”며 “실업률 등이 극단적으로 악화되는 상황을 가정해 테스트했어야 시험에 통과한 금융회사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고 말했다.

실제로 FRB 경기 전망은 월가 이코노미스트 등의 예측치와 비슷하다. 귀에 익숙한 ‘올 연말 회복 시작’ 시나리오의 복사판이다. 최근 미 경제의 추락 속도가 느려지고 있는 기미가 나타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내년 말에나 회복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여전하다. 엘리어트 말대로라면 이런 전망이 테스트에 더 걸맞은 셈이다.

실업률은 3월 이미 8.5%를 넘어섰다. 미 월가와 민간 경제연구소들은 최근 전망치를 수정하며 올해 말 실업률이 9%를 훌쩍 넘을 것으로 내다봤다. 전문가들은 내년 실업률이 12% 수준에 이르면 집값이 현재 수준에서 안정되더라도 금융 부실이 급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요즘 미 금융회사 부실은 주로 신용카드와 할부금융, 기업대출에서 발생하고 있다. 올 1분기에 발생한 전체 부실 가운데 40%가 소비자 채무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기지 대출에서 발생한 부실은 10% 남짓이다.

FRB의 집값 시나리오도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지난해 집값이 19% 하락한 점에 비춰 FRB가 추정한 올해 하락률 22%와 내년 7%도 상당히 가혹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해까지의 거품 시기 집값이 장기 평균치보다 3배 가까이 뛴 점을 감안하면 FRB가 좀 더 가혹한 시나리오를 마련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월가는 스트레스 테스트가 금융회사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켜 줄지 반신반의하고 있다. 76년 전‘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묘약’ 같지는 않을 듯하다는 쪽이다. 루스벨트는 1933년 4월 4일 믿고 거래할 만한 은행 명단을 내놓았다. 한 달 동안 은행의 자산과 부채를 샅샅이 조사한 뒤였다. 믿을 수 없는 은행으로 판정된 은행은 파산하거나 다른 은행에 흡수됐다. 발표 직후 극적으로 금융 신뢰도가 회복됐다. 예금인출 사태(뱅크런)도 급감했다. 30년 이후 해마다 은행 2200곳이 망했는데, 33년 4월 조사결과 발표 이후에는 연간 45곳 정도가 무너지는 데 그쳤다.

금융회사 생존 가능성에 대한 불신이 좀체 가시지 않은 올해 2월 버락 오바마의 경제팀은 루스벨트 당시의 경험을 떠올렸다. 그리고 주택대부조합(S&L)이 줄줄이 망한 80년대 후반에 정리신탁공사와 예금보험공사가 생존 가능한 대부조합을 고르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한 스트레스 테스트 기법을 끌어다 쓰기로 했다.

그러나 오바마의 테스트는 루스벨트만큼 전격적이지 않았다. 대부조합 사태 때만큼 철저하지도 않았다. 당시 대부조합은 모두 테스트를 받았다. 옥석이 철저하게 가려졌다. 전문가들은 이번 테스트가 고무 도장이나 다름없다고 꼬집었다. 금융회사 경영자들은 “이번 테스트가 신뢰도를 높여주지는 못하고 스트레스만을 야기했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자본 쟁탈전 벌어질 듯
미 금융회사들이 2007년 초에서 올 3월 말 사이에 손실처리한 자산은 모두 9214억 달러다.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한 지난해 9월부터 12월까지 석 달 동안 급증했다가 올 들어 진정되는 모습이다.

미 금융회사들이 9000억 달러가 넘는 자산을 손실처리하면서 국내외서 끌어들인 추가 자본은 6511억 달러다. 2700억 달러 정도 차이가 발생했다. 그만큼 미 금융회사 체력이 고갈돼 있는 셈이다. 게다가 추가 부실도 예상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미 금융회사 부실이 내년 말까지 2조7000억 달러로 불어날 수 있다고 밝혔다.

부실자산을 모두 손실처리할 필요는 없다. IMF는 미 금융회사들이 5000억 달러 정도 자본을 추가로 유치하면 생존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 미 민간연구소들은 1조 달러는 투자 받아야 할 것으로 전망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은 이번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금융회사들이다. 이들은 서둘러 추가 자본을 유치해야 한다. 오바마 행정부는 일정 시간을 주고 자구노력을 하도록 할 예정이다. 해외 투자자 등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하고, 그래도 부족하면 공적자금을 지원한다는 원칙이다.

월가는 부실한 이번 테스트가 뜻밖의 결과를 불러올 것으로 보고 있다.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금융회사뿐 아니라 통과한 회사들도 한 푼이라도 더 많은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을 벌일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개별 금융회사 테스트 결과가 다음달 4일 발표되면 합격한 회사들도 자본을 유치해 신뢰성을 높이려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월가 전문가들은 “어느 회사가 민간 자본을 유치해 생존할지를 놓고 시장에서는 예측 게임이 벌어질 것”이라며 “시장이 보기에 자본금을 끌어들이지 못할 금융회사는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미 금융회사들이 자본 확충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이 대출은 억제될 수밖에 없다. 돈을 빌려주더라도 부실화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더욱 엄격한 기준을 적용할 가능성이 아주 크다. 돈이 제대로 돌지 않는 상황이 당분간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이는 미 경제흐름은 물론, 세계 경제에도 달갑지 않은 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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