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호흡기' 떼려면 아직 멀었다…지원 1백억달러로 한달 벌었을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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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 고비를 넘기기는 했으나 외환위기의 불씨는 계속 살아 있다.

1백억달러의 조기지원으로 이달말까지 한달여의 시간을 벌었다는 것이지, 칼자루를 쥐고 있는 국제 금융기관들은 한국경제의 구조조정 노력여부에 따라 여전히 가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대외채무의 상환연장이 어느 정도 활발해지면서 정부나 여당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자칫 이런 움직임이 외국인에 '개혁의지가 없다' 는 것으로 비춰지면 사태는 순식간에 악화될 것으로 우려된다.

특히 국제통화기금 (IMF) 이나 미국정부의 요구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아 문제가 생길 경우 외국 민간 금융기관은 두말없이 등을 돌릴 것이다.

실제로 뉴욕에서는 대한 (對韓) 금융지원 논의가 예상외로 난항을 겪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외국은행들이 한국에 내준 단기자금들을 장기채무로 전환시켜 주는 문제들이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이면에는 한국의 대외 합의사항 이행에 대한 감시의 눈길도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현재 정부의 해외 자금조달 작업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한 관계자는 "정치권이나 정부가 지난 연말까지 대외적으로 약속한 조치들 가운데 일부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어 한국에 대한 불신을 가중시킬 우려가 크다" 면서 "특히 정치권이 한국의 합의사항 이행여부를 면밀히 주시하고 있는 외국의 시각을 심각하게 인식해야 할 것" 이라고 경고했다.

이 관계자는 "정치권과 정부의 합의사항 늑장처리가 자칫 또다른 위기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고 지적했다.

따라서 1월중이라도 임시국회를 열어 구조조정을 뒷받침하는 관계법의 입법작업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이행조건은 정부와 IMF의 1, 2차 의향서에는 실리지 않고 구두로 요구받은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IMF 등의 요구조건이 이해관계가 첨예한 해묵은 과제이거나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내용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미룰 수도 없는 실정이다.

이중 정리해고제 조기도입 방안의 경우 IMF 등은 모든 산업에 걸쳐 조속히 도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여당인 국민회의는 처음에는 우선 금융기관부터 도입하기로 했다가 다시 모든 산업으로 확대하기로 방침을 바꿨다.

2월 임시국회에서 관련법안을 처리할 예정이지만 어떤 식으로 결론날지 예측불허다.

달러를 들여오거나 나갈 때의 각종 규제를 담고 있는 외국환관리법 폐지 요구를 처리하는 문제도 공중에 떠있는 상태다.

적대적 인수.합병 (M&A) 허용도 정부내에서는 외국자본의 유치를 위해 허용이 불가피하다면서도 최대한 시기를 늦춘다는 방침이다.

소액주주도 대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집단소송 제도를 도입하라는 요구도 정부가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시기나 폭을 정하지 못해 지지부진한 실정이다.

이처럼 정부관료들이 뒷짐을 지고 있는 문제들은 국회가 나서서라도 빨리 매듭을 지어야 한다.

문제는 이같은 '국내 사정' 이 외국 정부나 국제기구.금융기관들에는 한국에 대한 불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정이 급한 곳은 돈주는 쪽이 아니라 달러가 필요한 한국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정부나 정치권의 상황인식을 재정비해야 할 시점이라는 지적이 많다.

고현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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