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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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엄마의 유품에서 스크랩 북을 발견한 뒤부터 저는 한동안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선생님과 관계된 모든 자료를 다 찾아봤어요. 그리고 제 나이와 선생님 나이, 그리고 연재하다 중단한 소설의 시간적 배경을 확인하여 제 탄생의 근원을 찾아나갔어요. 하지만 '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도 결국은 선생님이 갓 스물에 은명시를 찾아오는 부분에서 중단됐어요. 은명시에서 다시 만난 이미랑 선생과 선생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걸 알 수가 없었다구요. 그해 겨울, 두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면… 그래서 예상 못한 생명이 잉태됐다면… 그럼 지금의 저와 똑같은 나이가 된다는 걸 혹시 아시나요?” 자신의 탄생을 스스로 모멸스러워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는 말을 하고 나서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댔다.

울컥 그녀의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나는 그해 겨울, 그해 겨울, 하고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그해 겨울, 이미랑 선생과 나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그럼 이예린씨는 내가…. ” 그 순간, 명치 끝에서 울컥 치밀어 오른 무엇인가가 기도를 막아 더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왜 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시는 거죠? 붓꽃을 들고 선생님 댁을 방문했던 날… 아무런 이성적 감정을 지니지 말고 그냥 한번만 절 안아달라고 했을때의 선생님 표정을 보며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이렇게라도 한번… 그래요, 이렇게라도 한번 내가 모르던 은밀한 비밀의 감촉을 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온몸을 떨었어요. 그리고 반쪽의 정서만으로 세상을 살아온 듯한 느낌이 그 순간 온전하게 하나가 되는 것 같아서 집으로 돌아와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그런 나보다 엄마는 더 지독했어요. ” 말을 하고나서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런 그녀를 보자 다시 한번 헛구역질이 치밀어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도리질을 하듯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그녀는 연해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이예린씨가 태어난 이후… 그럼 이미랑 선생은 내내 혼자 살았던 거요?” “아뇨… 혼자 살지 않았어요. 아주 지독스럽게… 그래요, 혼자 산 게 아니라 자신의 추억을 반추하며 살았어요. 나에게 고통의 뿌리가 자라는지 모르는지… 그런 것도 모른 채 언제나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표정으로 한세상을 살다간 거예요. 그래서 엄마의 유품에서 선생님의 소설과 스크랩북, 편지 따위들이 발견됐을 때… 나는 직감적으로 선생님이 내 아버지라고 단정했어요. 그러니까 엄마는 오직 한 사람, 선생님만을 생각하다가 세상을 떠난 거예요. 그리고 세상을 떠난 뒤에 내가 그걸 발견하길 바랐기 때문에… 그래서 그걸 없애지 않았을 거예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건 자식에게 너무 가혹한 일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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