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유래]세종로 청와대…경복궁 뒤뜰이자 고려 이궁 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내년 2월25일 새주인을 맞이하게 될 청와대 (靑瓦臺) 의 터는 현재 행정적으로 종로구세종로1번지에 속하는 곳으로 경복궁의 뒤뜰이자 고려때 남경의 이궁 (離宮) 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고려 15대 임금인 숙종 4년 (1102) 5월 혹심한 가뭄에 이어 곧바로 6월에 큰장마가 지는등 나라안에 천재지변이 잇따르자 이른바 '오덕구 (五德丘 : 금.목.수.화.토의 다섯가지 덕을 나타내는 언덕)' 명당인 이곳에 궁궐을 짓고 그 기를 보호키위해 사람의 통행을 제한했던 금원 (禁苑) 으로 삼았다.

이태조가 조선개국후 맨먼저 도읍을 옮기기로 마음먹고 2년여의 갑론을박끝에 어렵사리 잡은 자리가 바로 이곳이다.

탐사팀장 권중화 (權仲和) 등이 '남경궁궐터는 너무 비좁아 남쪽으로 내 북악을 주산으로 북북동→남남서 향 (向) 으로 조영하면 좋을듯 하다' 는 주청에 따라 경복궁을 지었고 이에따라 이곳은 자연 그 후원이 됐던 것. 비록 궁의 뒤뜰이기는 했지만 상림원 (上林苑) 으로 불리던 이곳에는 임란으로 불타기전까지만해도 서현정 (序賢亭).취로정 (翠露亭).관저정 (關雎亭).충순당 (忠順堂) 의 전각이 있었다.

또 기화요초와 진귀한 새와 동물을 놓아기르기도 했는데 세종이 백성의 원한을 살 우려가 있다 하여 모두 없애버렸다.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 얘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곳엔 호랑이가 정말 무시로 출입하는 일이 잦아 태종이 이곳 우거진 숲을 지나다 호변을 당할뻔 한적도 있었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수때 이곳은 궁장 (宮檣) 으로 둘러쳐졌는데 서쪽에 추성문 (秋成門) 과 금화문 (金華門) , 동쪽에 춘생문 (春生門) , 북쪽에 계무문 (癸武門) 이 있고 안쪽 깊숙한 곳에 융문당 (隆文堂) 과 융무당 (隆武堂) 이 동서로 있어 그 앞뜰에서 문.무과의 대과 알성시가 치러졌다.

이곳에는 또 임금이 친경 (親耕) 을 하던 경농재 (慶農齋) 와 정자인 오운각 (五雲閣) 도 있었는데 일제가 1927년 이곳에 총독관저를 지으면서 오운각을 제외하고 모두 헐어버렸다.

일본식 양옥에 푸른 기와를 올린 이 '압제의 본산' 은 해방후 하지중장에 이어 정부수립과 더불어 이승만대통령이 관저겸 집무실로 사용하면서 다시 이땅의 최고 권위의 상징이 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이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기시작한 것은 4.19혁명후 윤보선대통령이 주인이 되면서부터. '독재의 산실' 이란 이미지를 벗기위해 미국의 '화이트하우스' 를 본떠 '푸른 기와집' 이란 의미로 붙여졌다.

지금의 청와대 건물은 지난 90년 새로 준공된 것으로 팔작지붕의 전통건물인데 이름값을 하느라 청기와를 머리에 얹었다.

이만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