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투자는 증시의 하이에나 공포와 탐욕을 먹고 자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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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호 06면

● 나는 겁이 많다. 겁이 많으니 소심하다. 투자할 때도 돈을 벌기 위해 애쓰기보다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돈을 잃는 게 무섭기 때문이다. 위험도 싫다. 공격적인 투자는 아예 하질 않으려 한다. (『이채원의 가치투자』 8쪽)

‘한국의 워런 버핏’ 이채원, 투자를 말하다

겁 많은 펀드 매니저가 2006년 4월 18일 펀드를 내놨다. ‘한국밸류10년투자주식’ 펀드. 1년도 안 돼 가입과 환매를 밥 먹듯 하는 문화에서 10년을 투자하라니…. ‘소심’한 사람의 제안치고는 과감하다. 주인공은 이채원(45·사진) 한국밸류자산운용 부사장. 1998년엔 국내 최초의 가치투자 펀드인 ‘밸류 이채원 1호’를 만들기도 했다. ‘한국의 워런 버핏’ ‘가치투자의 전도사’로도 불린다. 단타 매매가 판치는 한국 증시에서 그의 가치투자 펀드가 3년을 맞았다. 만들 때와 달리 주가가 급락해 마음의 고통도 꽤 있었다. 22일엔 그의 가치투자를 믿고 3년 전 돈을 맡긴 1000여 명을 서울 반포 센트럴시티로 불러 그간의 성과와 비전을 소개한다. 워런 버핏이 미국 오마하에서 매년 주주를 불러 축제를 여는 것을 벤치마크했다.(※는 독자 이해를 돕기 위한 편집자 주)

-3년이 지났다.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나.
“70~80점 정도다. 16일 현재 누적 수익률이 25%다. 같은 기간 코스피지수는 6.4% 하락했다. 코스피지수보다는 31.4%포인트 성과가 좋다. 그렇지만 당초 목표한 연 10% 수익에는 못 미친다.(※투자 설명서에는 펀드의 벤치마크를 ‘국고채 3년 지표금리+알파’로 명시했다. 펀드 운용 기간 동안 국고채 3년 지표금리는 연평균 4.86%였다)

-지난해 9월 투자자들에게 “지금은 주식을 살 때”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당시 1400선이던 코스피지수가 급락했고, 한 달 후엔 900선도 깨졌다.
“지수가 900 갈 줄 알았으면 당연히 팔라고 했겠지…. 그 정도로 떨어질 줄은 사실 몰랐다. 그걸 예측하는 재주는 나한테 없다. 그땐 가치보다 떨어진 종목이 널렸었다. 그리고 그때 들어갔던 종목 대부분이 2~3배 올랐다. 가치투자는 지수는 안 본다. 다시 돌아간 데도 똑같이 편지를 썼을 거다.”

-펀드 수익률을 보면 중소형주 등락에 따라 결정되는 것 같다.(※2월 현재 펀드가 보유한 종목은 124개, 코스닥 비중은 30%다)
“그런 오해를 많이 받는다. 중소형주 펀드 아니냐고. 아니다. 지금이야 그럴지 모르겠다. 그러나 99년 중반까지 나는 저평가된 대형주만 샀다. 99년 기술주 버블 때는 펀드에 코스닥 종목을 하나도 안 담았다. 2007년 4월 중소형주가 각광받았을 땐 오히려 중소형주를 팔았다. 그때 중소형주 상승세가 꺾인 게 우리가 팔아서라는 얘기도 있다.”

-펀드 규모(※17일 현재 설정액 1조2500억원)에 비해 지나치게 시가총액이 작은 기업에 투자해 주가를 띄운다는 비판도 있다.
“우리가 사면 주가가 빠진다(웃음). 주가가 두세 배 뛰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주가가 가치보다 비싸지면 가차 없이 판다. 오를 만하면 매물이 나오니 주가가 급등하기 힘들다.”

● 기술주 열풍으로 펀드 수익률이 하락하고 투자자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나는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느낌이 들고 손이 떨렸다…귀에는 물이 찼고 온몸이 구석구석 아팠다…회사 내부에서도 ‘왜 그리 고집을 부리느냐’는 얘기가 있었지만 나는 투자 방식을 바꿀 수 없었다. (『이채원의 가치투자』 46쪽)

-3년간 환매를 제한했다. 투자자를 강제로 묶는 것 아닌가.(※펀드를 1년 이내 환매하면 이익의 70%, 2년 내엔 50%, 3년 내엔 30%를 반납해야 한다)
“가치투자는 가치와 가격의 차이를 먹는 거다. 1만원짜리 주식이 2만원 될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데 언제 올라갈지 알 수 없다. 20년 넘게 투자해 보니 최소 3~4년은 있어야 되더라. 99년 그런 제한이 있었으면 롯데칠성을 6만원에 안 팔아도 됐다. 팔고 나니 30배 갔다.(※99년 기술주 버블 때 이 부사장이 운용하던 가치주 펀드는 시장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익을 올렸다. 그는 환매가 몰리면서 주식을 팔아야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가치투자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그걸 못 견디면 고객도, 운용사도 힘들어진다. 3년 환매 제한은 서로를 지켜 주기 위한 장치다. 환매를 못하는 건 아니다. 일부 고객들은 팔고 나가기도 했다.”

-운용보수가 연 0.76%로 비싸다.(※설정액 100억원 이상 주식형 펀드의 평균 운용보수는 연 0.59%다)
“그렇다. 그렇지만 우리 펀드는 주식 매매를 잘 안 한다. 그만큼 주식 매매 수수료가 적게 든다. 그걸 감안하면 오히려 비용이 적게 든다.”

-고객에겐 장기 투자하라면서 펀드매니저가 1년도 안 돼 바뀌는 경우도 많다.
“우린 다르다. 2000년 이후 동원증권 시절부터 같이 운용하던 팀원 중 1명만 그만뒀다. 운용 철학을 지켰기 때문이다. 수익률이 조금만 떨어지면 판매사 지점장이 달려오고 고객 전화가 빗발치는 게 이 세계 속성이다. 그러면 타협할 수밖에 없다. 돈을 믿고 맡겨 준 고객과 성과에 상관없이 무조건 믿어 준 경영진 덕분에 투자 원칙을 지킬 수 있었다.”

● 가치투자자는 다른 이들이 절망 속에 던져 버리는 주식을 기쁜 마음으로 덥석 채 가는 주식시장의 하이에나일지도 모른다…헐값에 주식을 사두었다가 희망과 광기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투자자들이 주식을 사들일 때, 거꾸로 주식을 팔아 찬물을 끼얹어 버린다.(『이채원의 가치투자』 13쪽)

-대한민국 모든 운용사가 다 가치투자한다고 한다. 가치투자가 뭔가.(※이 질문에 이 부사장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간단하다. 내재 가치보다 싸게 거래되는 주식을 사서 비싸게 파는 거다. 내재 가치는 ‘안정성+수익성+성장성’이다. 과거 얼마를 벌었고 지금은 얼마를 벌고 있으며 앞으로는 얼마를 벌 거냐는 거다. 나 같은 사람은 안정성과 수익성에 중점을 둔다. 성장성은 알 수 없어서다. 미래에셋자산운용 구재상 사장 같은 경우엔 성장성에 중점을 둔다. 성장주 투자도 가치투자의 일종인 셈이다. 이 세상의 모든 투자는 가치투자다.”

-가치투자의 미래는.
“영원하다. 100년간 살아남은 투자법은 이거 하나다. 인간의 탐욕과 공포가 있는 한 유효하다. 가치투자는 가격과 가치에 괴리가 생겨야 한다. 탐욕과 공포가 없다면 살 기회도 팔 기회도 없다. 그런데 가치투자는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짓이다. 개인들이 가치투자를 하겠다면 말리고 싶다. 마음을 다스리기 쉽지 않다. 지금도 지수가 급등하면 흥분한다. 그러면 성경책 보듯이 책을 편다. 『현명한 투자자』(※가치투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벤저민 그레이엄의 저서)는 수십 번 읽었다.”

-별명이 ‘한국의 버핏’이다.
“잘못된 별명이다. 워런 버핏은 펀드매니저가 아니라 사업가다. 돈도 훨씬 많고(웃음). ‘한국의 피터 린치’(※77~90년까지 13년 동안 펀드를 운용하면서 단 한 해도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하지 않은 투자의 귀재)라고 하면 영광이겠다. 10분의 1만이라도 닮고 싶다.”

-22일 고객 1000여 명을 초청하는 행사를 놓고 고객 돈을 쓸데없는 데 쓴다는 논란도 있다.
“고객이 펀드매니저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드물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갖고 운용하는지 알릴 수 있는 기회다.”

-올 시장에 대한 평가는.
“만만치 않다. 소비가 둔화되고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서 실물 위기가 나타날 거다. 지금의 경제위기가 1~2년 안에 끝날 문제는 아니다. 가계 자금도 동났다. 펀드에 돈이 안 들어온다. 2007년처럼 펀드가 이끄는 장을 기대하기 힘들다. 1500을 넘기 힘들 거다. 그러나 여전히 이익을 꾸준히 내는 기업이 있다. 그런 기업의 주가는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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