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의 삶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10호 02면

지난 늦가을, 악양골 ‘무딤이들판’에 자리 잡았습니다.
한쪽은 대지에 뿌리박고 또 한쪽은 조금씩 하늘을 향했습니다. 눈바람 날리는 겨울에는 한껏 몸을 낮추었습니다. 남풍에 땅이 풀린 요즘은 고개를 쳐들어 멀리, 더 멀리 세상을 바라봅니다. 무딤이들판을 초록 세상으로 물들였습니다.

PHOTO ESSAY 이창수의 지리산에 사는 즐거움

어지간히 성숙해진 지금, 이제는 뽑히거나 부러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거센 바람이 내 몸을 덮쳐도 주위 친구들과 서로 몸을 기댄 채 바람길 따라 하늘을 씁니다.
다가오는 5월 어느 날, 우리는 또 다른 길을 가야 합니다. 땅속에서 한 몸을 갈라 수십, 수백의 다른 몸을 만든 지난 시간, 우리는 자기 부정을 통한 순환의 진리를 몸소 실행했습니다. 이제 자식들 또한 묵묵히 그 길을 갈 겁니다.

이 들판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렇게 내리받은 사랑을 다시 내릴 수 있는, 살아 있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창수씨는 16년간 ‘샘이깊은물’ ‘월간중앙’등에서 사진기자로 일했다. 2000년부터 경남 하동군 악양골에서 녹차와 매실과 감 농사를 짓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