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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열도까지 울린 원조 한류 ‘歌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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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가수 조용필. 그에게는 ‘가왕’ ‘작은 거인’ ‘건국 이후 최고의 가수’ ‘국민가수’ ‘오빠부대의 원조’ ‘민족혼을 부르는 가수’ 등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세기가 저물어가던 1999년 한국갤럽이 실시한 ‘20세기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 설문조사 결과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노래영웅으로 공식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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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 조용필의 공연 모습.

영웅은 그 존재만으로도 대중에게 활력소가 될 수 있다. ‘영웅 만들기’에 목숨을 거는 일본인들과 달리 우리는 남을 인정하는 데 인색한 측면이 있다. 오죽하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다 있겠는가?

기획연재 한국이 낳은 불후의 대중가요 뮤지션 12인 - ④조용필

그런 면에서 조용필은 지극히 예외적이다. 모든 사람이 약속한 듯 찬사를 보낸다. 그에게 부여된 찬사와 더불어 오해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우선 1980년대 초 일본 무대에 진출한 조용필에 대한 오해 한 가지.

일본에 가보면 일본의 중년세대들이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멋들어지게 애창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조용필은 한류 열풍을 타고 생성된 지금의 ‘욘사마’ 배용준 열풍에 필적할 만한 성공신화를 이룬 선구적 뮤지션이다.

국제적 슈퍼스타의 반열에 오른 그의 위상에 걸맞게 그의 팬클럽은 일본·홍콩·대만 등 외국에도 상당수 존재한다. 그는 대중음악을 통해 외국에 한국을 알린 민간 외교사절이다.

그런 조용필에게 일부 대중은 “일본사람이 되려 했다”는 의혹을 보낸 적이 있다. 일본에서 발매한 그의 수많은 앨범에 수록된 일본어 노래들 때문이다. 원래 일본인은 모든 장르의 세계 각국 우수 인재들을 자국인으로 귀화시키는 데 선수다. 국내 대중음악인 중 신중현도 귀화를 권유받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조용필이 일본 무대에 진출했을 때 부른 레퍼토리들을 기억해보라. <한오백년><간양록> 같은 한국민요에 바탕을 둔 가장 한국적 노래가 대부분이었다. 그가 일본말로 많은 노래를 취입한 것은 사실이다. 이는 국내 가수들에게는 난공불락의 요새 같았던 일본 대중음악계의 장벽을 허물고 일본 대중 속으로 파고들기 위한 그의 적극적 전략이었다.

이 시대 최고의 가창력을 보유한 가수라는 대목을 살펴보자.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조용필을 세상에 알린 대표곡이라면 <창 밖의 여자>는 1980년대를 그의 일인독주시대로 나아가게 한 필살의 노래였다. <단발머리>는 대중에게 추억을 선사한 노래였고, <친구>는 온 국민을 그의 친구로 만든 노래다.

<꿈>과 <큐><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잃어버렸던 꿈을 되살려준 노래였다. 그의 대부분의 노래는 이처럼 장르와 가사는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슬픈 정조의 한이 배어있다는 점이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깊고 넓은 음역으로 토해내는 그의 노래는 그래서 한국적이다. 그는 1977년 대마초 사건에 연루돼 활동 정지의 아픔을 겪었다.

좌절할 수도 있었던 그때도 그는 음악에 매진했다. 당시 그가 선택했던 창법은 우리 고유의 판소리 창법. 피를 토하는 연습을 통해 그는 우리 가락의 깊고 한스러운 울림소리를 체득했고, 득음의 경지를 획득했다.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반전시켰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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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해외 공연을 마치고 귀국한 조용필에게 팬들이 사인을 요청하고 있다.

민요에 바탕을 둔 노래로 일본 공략

조용필은 ‘오빠부대의 원조’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전성시대였던 1980년대 소녀 팬들이 마치 노래 가사의 일부처럼 터뜨렸던 “꺅~” 하는 비명소리에 대한 선명한 기억 때문이다. <단발머리>도 그를 ‘영원한 오빠’로 만들어준 아줌마부대가 열광하는 노래다. 하지만 ‘오빠부대의 원조’라는 평가는 오해다.

극성 소녀 혹은 여성 팬들로부터 ‘오빠’라는 환호를 받은 가수로는 조용필에 앞서 1970년대에도 남진·나훈아가 존재했고, 그보다 훨씬 앞선 일제강점기에 ‘서정가요의 제왕’으로 칭하는 남인수도 있었다. 당시 그들의 공연이 있는 날에는 밀려드는 여성 팬들로 인해 극장은 인산인해를 이뤘고, 귀를 따갑게 하는 괴성과 극장 유리창 파손은 기본 통과의례였다.

특히 남인수의 경우 공연 후 그를 모셔가려는 인력거가 극장 주위에 장사진을 이뤘을 정도였다. 1980년대의 조용필이 ‘오빠부대의 원조’가 되기에는 우리 대중음악의 역사가 그리 만만치 않다. 팬클럽의 경우도 그렇다. 1970년대에 이미 남진은 대규모 팬클럽을 보유했고, 단체로 대형 야외모임을 개최해 이슈가 되기도 했다.

남진보다 앞선 ‘최초의 댄스가수’ 이금희도 특이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66년 <키다리 미스터 김>을 크게 히트시킨 그는 180cm가 넘는, 당시로서는 ‘키다리’들로 구성된 팬클럽을 보유했을 정도다.

오디션에 탈락하는 굴욕 맛보기도

조용필은 ‘가왕(歌王)’이라고 불린다. ‘가수들의 왕’이라는 말이다. 단순히 노래 잘하고 인기가 많다는 이유라면 그 같은 호칭은 부적절할 수도 있다. 인기와 가창력은 기본이고, 그는 실험정신에 시대정신까지 잃지 않은 가수였다. 조용필의 노래는 지난 40년 동안 한국인의 지치고 아픈 마음을 위로해준 가락이었다.

특히 한국인의 정서를 담아내려는 그의 노력은 기성세대의 절대적 호응으로 이어졌다. ‘가왕’은 그의 노래에 위로받은 이들이 부여한 정당한 호칭일 것이다. 그런데 ‘엘레지의 여왕’으로 불리는 이미자까지는 공감하겠는데, 이 좁은 나라의 가요계에 무슨 황제와 여왕이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발라드의 황제’ ‘트로트의 황제’ ‘알앤비의 제왕’ ‘록의 제왕’ ‘섹시 퀸’ ‘댄스 황제’ ‘댄싱 퀸’ 등….

좋아하는 가수에게 극한의 찬미적 표현을 붙이고 싶은 대중의 애틋한 마음은 알겠지만 이 정도면 확실히 남발이다. 그렇다면 최고의 찬사를 헌사받은 가왕 조용필의 40년 음악인생은 언제나 장밋빛의 연속이었을까? 아니다. 우리의 음악영웅도 대중적 인지도를 획득하기까지 힘겹고 고통스러운 기간이 한참 있었다.

지금도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후 독신으로 외롭게 살고 있다. 모든 것을 이뤄낸 것 같아 보이는 그의 인생도 실제로는 창작의 산고와 더불어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의 연속일지 모른다. 힘겨운 과정을 극복했기에 그의 존재가치가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데뷔 시절 에피소드 몇 가지를 소개한다.

어린 시절 조용필은 친구들 사이에 ‘풀빵’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모나지 않은 둥글둥글한 성격 때문이었다. 그는 열 살 때 뒤늦게 찾아온 홍역으로 인해 왼쪽 눈의 시력을 잃을 뻔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심야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외국 팝송을 즐겨 듣기 시작했고, 이후 기타 배우기에 빠져들었다. 중2 때 서울 정릉으로 이사했다.

국민배우 안성기는 경동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다. 경동고를 졸업한 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음악에 인생을 걸었다. 구체적 행동은 가출이었다. 집을 나온 조용필은 동네 친구 3명과 동대문 근처에 허름한 창고를 개조한 월세 방을 얻어 록 그룹을 결성했다. ‘애트킨스’다. 열심히 연습했지만 일자리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노래할 무대를 찾기 위해 경기도 문산의 용주골로 들어갔다. 흑인 병사와 양공주들이 던져주는 팁으로 생활했던 그 세월은 그의 음악인생에서 가장 가혹한 시절이었다. 클럽 무대에서 실전감각을 익히던 그때. 수소문 끝에 업소로 찾아온 가족에게 이끌려 고향으로 돌아갔다. 반 년 동안 원치 않는 대학입시 준비를 하며 잠시 음악을 접어야 했다.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세계 “대중의 노래 부르고파”

또 다시 가출했다. 이번에는 경기도 광주의 무명 하우스 밴드에 잠시 합류했다. 연주활동만 했던 그가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은 보컬을 맡은 멤버의 군 입대 때문이다. 리드보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대타로 우연하게 무대에 섰다. 가수로서의 첫발이었다. 이후 해체 직전의 밴드 ‘화이브 핑거스’를 거친 조용필은 멤버 충원 오디션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신 적도 있다.

천하의 조용필이 말이다. 1970년의 일이다. 록 밴드 ‘비스’의 베이스였던 손정택은 “지금은 대 스타이지만 당시 조용필은 기타 실력이 모자라고 보컬이나 음악 스타일이 헤비메탈을 추구하는 우리와 맞지 않아 떨어뜨렸다”고 회고했다. 그때까지의 조용필은 미완의 대기였다는 말이다. 이후 록밴드 ‘김트리오’의 멤버가 된 조용필은 1971년 5월 선데이서울컵 전국 그룹사운드경연대회에서 가수왕을 수상하며 전환기를 맞는다.

독집까지 발표했지만 폭넓은 대중적 인지도를 획득하지는 못했다. 1971년, 최초로 그의 육성 노래 4곡이 담긴 데뷔 음반 ‘뮤지칼 사랑의 일기/사랑의 자장가’에는 그의 이름이 ‘조영필’로 표기돼 있다. 그의 이미테이션 가수 이름과 같다. 인쇄 과정에서의 실수였지만 웃음을 머금게 한다. 1976년 재취입한 <돌아와요 부산항에> 발표 이후 스타로 떠올랐던 그는 대마초 파동에 연루돼 음악인생에서 최대 위기를 맞이했다. 조용필의 회고다.

“당시 남산의 지하 취조실로 끌려가 주전자고문 등 갖은 고문을 당했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한 절망감에 이 땅을 뜨고 싶었다.” 조용필은 장르를 규정하기 힘든 가수다. 록을 뿌리로 트로트·포크·발라드·댄스·퓨전·동요·민요 등 모든 음악 장르를 섭렵한 만능 뮤지션이다. 어떤 이는 조용필 자체가 하나의 장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의 공연에 가보라. 시작부터 끝까지 히트곡 퍼레이드다. 관객들이 원하는 그의 노래를 다 부르려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이다. 그야말로 그의 공연은 장르가 총망라된 대중음악의 성찬장이다. 대중음악인이 대중친화적 장르와 노래를 구사하는 것이 하등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조용필의 대중친화 일변도 음악세계에 대해 아쉬움을 피력하는 이가 제법 있다.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확고하다.

“음악은 아이디어·영감 등이 중요한 것이지, 자기 삶이 순탄치 않고 좀 그렇다 해서 음악에 연관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가수는 한 명의 ‘엔터테이너’이고 ‘노래 연기자’입니다. 가수로서 인정받으려면 젊은 층에서부터 노년 팬까지 좋아할 수 있도록 민요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내 장르로 들어가겠지만 내 삶을 곡으로 만드는 일은 없을 것 같아요. 나는 대중이 ‘저것은 바로 내 노래야’ 라고 느끼는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축구선수 이회택의 도움으로 만든 히트 앨범

1976년 4월25일 발매된 <돌아와요 부산항에> 초반.

조용필의 대표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말이 필요 없는 국민가요다. 하지만 우연하게 부른 이 트로트곡이 대중적 인지도와 좌절을 함께 안겨줄 운명의 노래가 될 줄은 조용필 자신도 몰랐다. 1960년대 말에 탄생한 이 노래는 취입 역사가 복잡하다. 최초로 이 노래를 부른 가수도 조용필이 아니다.

조용필보다 2년 앞서 1970년 유니버샬레코드에서 <돌아와요 충무항에>라는 제목으로 통영 출신 김성술이 작사해 김해일이라는 예명으로 처음 발표했다. 충무항을 소재로 삼은 가사만 다르고 곡은 똑같다. 조용필이 첫 녹음을 한 1972년만 해도 이 노래를 취입한 가수는 김석일 등 몇 명의 가수가 더 있었다.

1972년 조용필의 첫 독집 <조용필 스테레오 힛트 앨범>은 100만 원을 호가하는 진귀한 음반이다. 이 음반은 전체적으로 팝 스타일이 기조를 이룬다. 약관 22세의 청년 조용필의 앳된 목소리에 통기타 두 대로 연주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수록 여부가 신기한 트로트 버전이다.

그저 통속적인 사랑노래였다. 가사도 우리가 아는 버전과 달랐다. 1976년 재녹음 당시는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의 고국 방문이 사회적 화두로 뜨거웠던 해였다. 통속적인 사랑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그리운 내 님아” 부분을 “그리운 내 형제여”로 수정돼 시대상을 담은 노래로 환골탈태해 조용필에게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안겨주었다.

어쩌면 명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지금껏 사장되었을지도 모를 운명이었다. 조용필의 1976년 히트 앨범에 얽힌 사연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당시 그의 매니저는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한 국가대표 축구선수 출신 이회택이었다. 막 기획사를 출범한 록 밴드 ‘영사운드’ 출신의 제작자 안치행에게 그가 조용필의 음반 제작을 부탁했다.

이에 안치행은 킹레코드에 제작을 의뢰했다. 하지만 뮤지션 출신으로 최초의 제작자가 된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박성배 사장(일명 킹박)은 “노래가 너무 일본 놈 스타일이어서 안 된다”며 박대했다. 예상치 못한 난관에도 안치행은 오기로 음반 제작을 강행했다.

조용필의 노래만으로 앨범을 내기에는 곡이 모자랐다. 이에 록 그룹 ‘영사운드’의 기성곡을 채워 넣어 1976년 4월 빨간 바탕에 조용필의 장발 사진이 담긴 초반이 나왔다. 방송에 홍보조차 하지 못한 이 앨범은 새벽다방 등 소위 다운타운가를 통해 부산을 시작으로 급속도로 반응이 생겨났다. 4개월 후 깔끔하게 머리를 정리한 조용필의 사진으로 디자인을 교체해 재발매한 음반은 100만 장 판매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이후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리메이크 열풍을 탔다. 1978년에는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었고, 1979년에는 세계적인 폴모리아 악단에 의해 연주곡으로도 취입됐다. 호사다마라고 할까? 유명세를 탄 조용필은 1977년 장충체육관의 그룹사운드경연대회 공연을 끝으로 대마초 사건에 연루돼 활동 금지의 아픔을 겪었다. 1979년 해금 후 활동은 재개했지만 그는 한동안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의식적으로 부르지 않았다.

저작권 침해 소송에 휘말렸던 이 노래는 2006년 3월 가사의 일부 표절을 인정하는 판결이 내려져 충격을 던졌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 설정이겠지만, 만약 이 노래를 조용필이 부르지 않았다면 일본은 물론 대만 가수 등려군까지 리메이크한 이 아시아의 명곡은 지금도 지하에 잠들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전 <한국일보> 기자이자 프로 사진가. 7080 음악열풍을 주도한 공연기획자.

희귀 음반을 비롯한 대중문화자료 수집가. KBS·SBS·CBS·교통방송 등에서 음악프로그램 진행. 현재 대학에 출강하는 한편, 각종 신문·잡지·사보에 대중문화 관련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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