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 길잡이]고전 읽기보다 비판적 사고 훈련 효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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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수능 점수가 전반적으로 높아질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수험생들의 논술 준비에 비상이 걸렸다. '고전(古典)을 바탕으로 출제할 것이라는 서울지역 12개대학의 공동 발표가 있자 많은 학생들이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고전을 읽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요약본을 찾기고 한다. 그러나 '고전을 바탕으로 출제한다'는 것은 '고전에서 출제한다'는 것이 아니라 '고전적인 주제, 다시말해 원칙적인 주제를 출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만큼 교과서에 충분히 언급되어 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학생들에게 보편적인 주제를 출제한다.

이같은 경향은 1개 대학의 논술고사 모의 문제와 서울대의 고교장추천 전형 지필고사<본지 11월 27일자 13면 보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12개 대학은 18세기말 독일 철학자 피히테의 '인간의 소명'에서 지문(指文)을 출제했다. 이 논제는 오늘날 학계에서 가장 첨예하게 논의되는 근대적 이성에 대한 반성을 요구한 것이다. 여기에서 피히테의 제시문은 이성에 대한 근대적 이해의 전형을 보여주고자 한 것일 뿐이다. 피히테 뿐아니라 근대이후 많은 사상가들이 '이성=자연지배=질서=진보'로 인식해왔으나 최근 관료화와 환경파괴등 위기에 봉착하고 있는 서구 이성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 논제는 바로 이같은 논의를 배경으로 출제한 것이다.

고려대가 최근 발표한 논술 모의고사는 비록 고전에서 지문을 출제하지는 않았지만 고전적인 주제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인문계 논제는 장례식 절차를 예로 들어 형식에 얽매인 절차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글과 비록 형식이지만 그것이 인간을 고귀하게 여기는 정신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글 두편을 싣고 형식과 내용 중 어떤 것이 중요한 가를 묻는 것이다.

형식과 내용의 관계는 철학의 중요한 주제중에 하나다. 형식은 내용을 질곡(桎梏)할 수도 있꼬 반대로 형식이 내용을 풀부하게 할 수도 잇다. 이외에도 형식과 내용의 조화를 강조할 수도 있다.

자연계 논제는 평이한 글을 지문으로 출제했지만 여기에는 지식에서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쟁점을 제시하고 있다. 까마귀 빛깔의 변화와 요동 땅의 경치를 예로 들어 인가늬 경험이 매우 유동적이고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는 요지의 지문 두개를 주고 지식형성 과정에서 경험과 이성의 역할을 논술하라는 것이다. 이 주제는 근대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 중에 하나다. 즉, 경험이 비록 지식 내용을 얻게 하지만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 보편적 지식을 얻을 수 없으며 이성은 보편타당한 지식을 얻을 수 있지만 공허할 수 있다는 것이 그 핵심적인 요지다. 지금은 시간상 그것을 읽어 소화할 수 없다. 논술고사는 고전적 지식을 바탕으로 어떤 글이든 그것을 읽고 쟁점을 찾아내 자신의 입장을 전개할 수 있는 능력을 측정하는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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