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행의 옴부즈맨칼럼]'야합' 여부 분명히 가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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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독자들의 전화를 받을 때도 그렇지만 독자들의 편지를 읽을 때마다 나는 독자란 존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절감하게 된다.

진지하게 신문을 읽는 독자 앞에선 신문에 실린 기사나 논평이나 할 것 없이 적나라 (赤裸裸) 하게 의도하는 바와 정체 (正體)가 어쩔 수 없이 드러나게 마련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신문을 읽는 독자의 자세는 한결같이 같을 수는 없을 터이다.

신문에 난 것은 모두가 진실이라고 믿는 독자가 있는가 하면, 신문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독자도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어떤 이해관계에 얽힌 기사인 경우 그것이 정치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간에 독자의 자세나 견해가 '극 (極)' 과 '극' 으로 갈라지기도 한다.

이런 독자의 극단적인 반응은 신문을 만드는 처지에서 보면 곤혹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런 개별 반응에 일일이 응대할 수 없는 것이 신문이고 보면 그에 대한 유일무이한 대처방안은 '객관성' 과 '공정성' 일 수밖에 없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최근 내가 받은 몇 통의 편지 가운데 특히 나의 주목을 끈 것은 이른바 '야합 (野合)' 과 관련된 시비론 (是非論) 이었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당과 정당이 합당한 것은 '야합' 이고, 정당과 정당이 연합해 단일후보를 공천한 것은 '야합' 이 아니냐의 여부를 놓고 신문의 기사나 칼럼들에 대한 비판이 여간 호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시비를 보면서 나의 머리엔 오래 전에 읽었던 '야합' 의 어원 (語源) 과 그에 얽힌 사연들이 떠올랐다.

'야합' 이라는 말이 처음 쓰여진 것은 '사기 (史記)' 의 공자세가 (孔子世家) 편에서였다.

대성인 (大聖人) 인 공자의 탄생과 관련해 '야합' 이라고 쓰고 있는 것이 그것인데, 공자의 탄생을 일컬어 '야합' 이라고 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공자라면 유교 (儒敎) 의 성조 (聖祖) 고 중국을 지배한 통치철학이 유교에 바탕한 것인데, 감히 거기에 '야합' 이란 말을 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공자의 탄생을 '사기' 는 분명 '야합' 이라고 기록했다.

이렇게 쓴데 대해 일부에서는 그것이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공자는 생존시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적지 않은 비판자들로부터 비난과 중상 (中傷) 을 받았으며 그것이 기록으로 남게 됐다는 이야기다.

'사기' 에 쓰여진 내용은 매우 간결하다.

공자는 그의 아버지 숙량흘 (叔粱紇) 과 안 (顔) 씨집 딸의 '야합' 에서 출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만 가지고는 왜 '야합' 이란 말을 굳이 썼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학자들의 풀이를 읽어 보면 해답은 '사기' 의 주석서 (註釋書)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 풀이를 따르면 남자는 16세에 양도 (陽道)가 통하고 64세에 그것이 폐절되고, 여자는 14세에 음도 (陰道)가 통하고 49세에 그것이 폐절된다고 돼 있다.

그런데 공자의 아버지는 이미 64세를 넘어선 나이에 顔씨집 딸을 취했기 때문에 '야합' 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다시 말해 양도가 폐절된 다음에 결혼하는 것은 예교 (禮敎)에 반 (反) 하는 것이므로 '야합' 이라고 규정했다는 이야기다.

공자의 언행록 (言行錄) 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지칭되는 '공자가어 (孔子家語)' 에 보면 공자의 아버지는 정실 (正室) 과의 사이에 딸 아홉을 두었을 뿐 후사가 없었다.

첩 (妾) 의 몸에서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발병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64세가 넘은 뒤 顔씨집 딸을 얻어 겨우 낳은게 공자였다는 설명이다.

'야합' 이란 말은 이런 사연과 얽혀 생겨난 것인데, 그후로는 양친 (兩親) 의 허락이나 중매인 없이 짝짓는 것을 비난하는 뜻을 지니는 것으로 쓰이게 됐다.

우리말 사전에 보더라도 '야합' 의 뜻풀이는 사통 (私通) 또는 부부 아닌 남녀가 서로 정을 통함이라고 돼 있고, 나아가 좋지 못한 목적에 서로 어울리는 것 또는 서로 배 (腹)가 맞음이 곧 '야합' 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야합' 이란 말은 반도덕 (反道德) 과 비윤리 (非倫理) 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정치세계에서 정치지도자의 행위나 정당활동에 '야합' 이란 말이 거리낌 없이 사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것은 정치에서 부도덕.비윤리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신문의 입장에서는 어느 것이 야합이고, 야합이 아닌지를 분명히 가려 독자에게 알려야 할 책무가 있다는 것을 강조해 두고 싶다.

어떤 의미에서든 도덕성의 문제는 특히 정치지도자의 '존재' 이유를 결정짓는 으뜸가는 요소며, 오늘날의 시대상황에선 그것을 판별하는 분명한 자세를 언론이 취하는 것처럼 중요한 일도 없다고 믿는다.

언론이 바른길을 걸으려면 비단 정치의 '야합' 과 '술수 (術數)' 에 놀아나지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 언론 내부에서 비록 일부일지라도 정치와 사통함으로써 '야합' 하는 것을 엄히 경계해야만 할 것이다.

물론 '야합' 의 고사 (故事)에서 '야합' 과 공자는 전혀 별개며, '야합' 의 결과 위대한 공자가 탄생했다는 풀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풀이나 입론 (立論) 이 우리의 대선 (大選)에 적용돼선 안될 일이다.

이규행 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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