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입금 상환연장" 정·재계 긴급명령 요구 …국가 '금융고립' 자초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현재의 경제난국을 둘러싼 정부.정치권.재계의 공방속에 나라 경제가 더욱 멍들고 있다.

재계가 대통령 긴급명령을 통한 차입금의 상환연장등 무리한 요구를 하고 나섰고 정치권이 이에 장단을 맞추면서 그나마 실낱같이 남아있던 외국인 투자자들로부터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릴 위기에 놓였다.

'긴급재정명령' 이란 이름으로 국내 채권.채무를 동결할 경우 신규차입은 고사하고 이미 들어와 있던 외국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태마저 우려되고 있다.

특히 외국인 투자자들이 정부의 제일은행에 대한 현물출자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상황에서 투명성이나 예측 가능성과는 완전히 거꾸로 가는 정책을 펼 경우 시장원리를 강조하는 국제통화기금 (IMF) 등 국제기구로부터 지원받기 어렵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국내외 금융기관들은 정치권과 재계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벌써부터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29일 금융계에 따르면 지난 27일 30대 그룹 기조실장들이 만기도래 차입금의 상환연장을 대통령 긴급명령의 발동으로 보장해 달라고 정부에 건의하자 홍콩.싱가포르의 외국계 은행들이 잇따라 국내 금융기관에 전화를 걸어 구체적인 내용.조치 가능성등을 문의하고 있다.

특히 이회창 (李會昌).김대중 (金大中) 후보등 차기 집권가능성이 큰 유력후보가 재계 주장에 동조하고 나선데 대해 외국은행들은 매우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홍콩의 한 브로커는 "누가 당선되든 지불유예 (모라토리엄) 를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문의했고, 또 다른 브로커도 "자칫하면 한국이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기 위한 전단계로 여론을 형성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고 지적했다.

외국은행 관계자는 "IMF 구제금융 지원 요청후 다소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곳도 정치인들의 발언으로 부정적으로 돌아서고 있는 곳이 많다" 고 전했다.

한편 일본에 진출한 한국계 은행 관계자는 "일본 대장성은 두달전부터 주요 금융기관에 대해 한국에 대한 대출금 상환을 자제하라고 창구지도를 해왔으나 만약 이런 조치가 내려질 경우 일제히 대출금 회수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고 우려했다.

정부도 이런 긴급명령발동 주장에 대해 강력 반발하고 있다.

재경원 관계자는 "재계의 요구는 한마디로 지난 72년의 '8.3조치 (사채동결 조치)' 를 지금 또 해달라는 것" 이라며 "정치권이 대선을 앞두고 표를 끌기 위해 모든 주장을 다 수용하고 있는 셈" 이라고 일축했다.

정부의 또 다른 당국자는 "지금 금융기관의 모든 채권.채무를 동결하면 신용질서가 완전히 붕괴된다" 며 "이렇게 되면 그나마 금융권에서 돌던 돈마저 다 빠져나가 금융이 마비됨은 물론 부동산등 실물투기 바람이 일 것" 이라고 밝혔다.

도쿄 = 이철호 특파원, 남윤호.양선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