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창열부총리 방일교섭 무엇을 얻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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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부가 급해졌다.

종금사와 은행들의 외환부도를 하루하루 막아주는 과정에서 외환보유고가 썰물처럼 빠지고 있어 국제통화기금 (IMF) 의 지원만 앉아서 기다릴 형편이 아니다.

자칫하다가는 지난 95년 멕시코처럼 채무동결.상환기간 재조정 (리스케줄링) 의 수순을 밟을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다.

임창열 (林昌烈) 부총리가 28일 다른 예정을 취소하고 일본으로 간 것도 이 때문이다.

다음달 1일 말레이시아에서 열리는 동남아국가연합 (ASEAN) +6개국 확대회의에서 별도로 만나 지원을 요청할 생각이었으나 일본 대장상이 불참함에 따라 직접 갔다.

그만큼 상황이 절박하다는 얘기다.

정부는 일본이 태국에 지원한 40억달러보다 훨씬 많은 1백억~2백억달러를 기대하고 있다.

林부총리는 이날밤 미쓰즈카 히로시 (三塚博) 대장상과의 회담을 마친후 "구체적인 수치는 논의하지 않았지만 충분한 금액의 지원에 합의했다" 고 밝혔다.

일본측의 지원에 상당한 기대를 가지는 표정이었다.

일본의 지지통신도 "IMF의 지원과 함께 일본정부가 한국지원에 나설 것임을 정식으로 표명한 것" 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일본측의 공식반응을 보면 낙관하기는 이르다.

미쓰즈카 대장상은 ▶일본 금융기관의 한국에 대한 대출한도 유지를 명시적으로 약속하지 않았고 ▶시장심리 안정의 관건인 지원규모를 구체적으로 밝히지도 않았다.

일본보다 먼저 IMF와 이야기를 끝내라는 것이다.

아태경제협력체 (APEC) 총회에서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郎) 총리가 밝힌 "IMF프로그램하에서 최대한 지원" 이라는 원칙에서 별로 진전되지 않은 셈이다.

이는 일본의 내부사정이 별로 좋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은 태국.인도네시아 통화위기 때는 세계 금융관계자들을 도쿄 (東京) 까지 불러들여 협조융자를 유도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 스스로가 급하다.

4대 증권사인 야마이치 (山一) 증권까지 무너져 대장상.일본은행 총재까지 나서서 "시중 루머에 휩쓸리지 말라" 는 긴급담화까지 내놓을 정도다.

또 일본내 여론도 우호적인 편은 아니다.

"일본은행 특융을 투입하고 국민 세금인 재정자금까지 동원해 불량채권을 해결하는 마당에 왜 한국을 지원하느냐" 는 반응이다.

여기에다 하시모토정권 자체가 언제 무너질지 모를 유동적인 상황이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의 입장을 이해하는 유력정치인들이 스캔들에 휘말려 있다.

우리 정부는 상황이 다급한 만큼 IMF가 내건 조건의 상당부분을 수용하고 많은 자금을 조속히 받아내되 그와 거의 동시에 주변국 지원도 받을 생각이었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IMF가 빨리 나서주는 것이다.

그래야 다른 곳도 따라온다.

IMF도 실사를 통해 한국의 외환위기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판단을 내린듯 싶다.

이에따라 가능한한 한국측 요구에 맞춰 일단 급한 자금은 세부 지원조건이 결정되기 전에라도 주겠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부가 기대하는 총5백억~7백억달러의 자금을 확보하려면 IMF나 세계은행 (IBRD).아시아개발은행 (ADB) 등 국제기구외에도 주변국의 협조가 절대적이다.

크게 기댈 곳은 역시 미국과 일본이다.

따라서 일단 일본과 자금규모 윤곽을 잡은뒤 말레이시아 확대재무장관회의에서 이를 토대로 주변국 협조융자를 끌어낸다는 복안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지원에 나설지가 아직 분명치 않은 상황이다.

강만수 (姜萬洙) 재경원차관은 "일본이 소극적이면 다른 국가도 지원을 꺼릴 것" 이라며 "일본이 주도적 역할을 해줘야 한다" 고 강조했다.

姜차관은 "멕시코위기때는 이웃나라인 미국이 중심이 돼 해결했다" 며 "일본이 든든했더라면 우리도 덜 어려울텐데…" 라고 아쉬움을 표시했다.

미국은 지난 95년 멕시코가 받은 5백20억달러의 긴급자금 가운데 2백억달러를 내놓았었다.

도쿄 = 이철호 특파원, 고현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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