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탈개성속에 드러나는 개성 '전환의 공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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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선두주자였던 '요셉 보이스' 는 모든 사람은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저 바닥에 엎지른 우유의 흔적도,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공사장의 벽돌도 예술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일반 관객은 낯설 뿐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조개껍질이 가득 담긴 가방이 놓여있기도 하고, 당당하게 피아노가 한대 놓여있기도 하다.

전기상에서 파는 형광등으로 쌓아 올린 기념비가 있는가하면, 무언가 잔뜩 씌여있는 것 같지만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는 화면과 만나기도 한다.

수없이 명멸하는 광고 간판들 속에서 오늘의 삶을 경고하는 작품도 눈에 뜨인다.

읽어보면 '당신은 원하면 누구든지 죽일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 그런 식의 신랄한 메시지들이다.

피카소나 마티스의 표현적인 그림에 익숙한 일반 관객은 이런 작품들 앞에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공부를 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무언가가 저 속에 존재하리라' 고 그들은 느낀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검은 사각형의 그림으로 알려진 '에드 라인하르트' 는 이미 1940년대 말에 자신의 작품을 이해되어서는 안되는 최초의 그림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미술이 모든 정치 이데올로기와 철학과 문학등 타분야에서 완전히 독립되어 미술 본연의 형식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평면 자체의 순수성과 절대성을 강조한 모더니즘 미술이다.

이후의 미니멀리즘 미술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그 그림자나 흔적 조차 최소화하여 더 이상 그림이기를 거부하는 미술이다.

그것은 작가의 개성적 표현을 완전히 배제한 평면이거나 작가의 체취가 묻지 않은 공장에서 만든 생산품들을 사용하는 입체 작품들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탈개성을 통해서도 각 예술가들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미술사의 흐름은 그렇게 부정되면서 확장되고 연속되면서 사라지고 재해석된다.

그림의 종말을 예고한 미니멀리즘은 미술과 철학이 접합되면서 개념미술의 지평이 열리는데 기여한다.

80년대 들어 다시 그리는 일의 의미와 작가의 개성적 표현이 복권되면서 신구상회화운동이 일어난다.

이 세상에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난해한 현대 음악이 출현해도 아직도 사람들은 바하를, 모차르트를 연주하듯이. 그렇듯 그림을 그리는 원초적인 행위나 캔버스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지 모른다.

몹시 정선된 소장품들로 전시된 '전환의 공간' 전은 뉴욕이나 파리가 아닌 서울에서 '현대의 미술' 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 한다.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조용히 생각하는 공간을 마련해 주기도 할 것이다.

황주리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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