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돋보기 ③ 50프랑 지폐 속 어린왕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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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유로화 통용 이전에 프랑스를 방문한 이들은 무심코 받아든 50프랑 지폐를 보고 미소지은 추억이 있으리라. 한 뼘이 채 안 되는 앙증맞은 네모 속에 동화소설『어린왕자』속 낯익은 장면들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소혹성 B-612 위에 서 있는 어린왕자와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리고 이들을 창조한 아버지라 할 소설가 생텍쥐페리(1900∼44)와 그의 분신과도 같았던 비행기까지. 마치 생텍쥐페리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은 듯 화폐 디자인에도 자유로움과 예술적 감성이 넘친다. 게다가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거야”라고 말했던 어린왕자의 메시지를 전달이라도 하듯, 프랑스 조폐당국은 어린왕자가 키우고 싶어했던 양 한 마리를 위조 방지장치로 안 드러나게 숨겨두는 재치를 보였다. 이 양은 지폐 앞면 왼쪽 아래에 자외선을 쬐야만 볼 수 있다.

유로화 통용 이전에 쓰였던 프랑스 50프랑 지폐 앞면. 작가 생텍쥐페리의 초상화를 중심으로 보아뱀·비행기·어린왕자가 들어있다.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 제공]

18세기에 최초로 등장한 프랑스 지폐는 처음엔 글씨만 적혀 있는 증서에 가까웠다. 그러다가 1945년 현재의 프랑스 중앙은행이 설립되면서 다양한 도안들이 삽입된 현대적 의미의 지폐가 발행되기 시작했다. 도안에는 생텍쥐페리를 비롯해 작곡가 드뷔시(1862∼1918), 화가 세잔(1839∼1906), 건축가 에펠(1832∼1923) 등 프랑스가 자랑하는 문화예술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2002년 1월 1일부터 유로화를 사용하면서 안타깝게도 국가 고유의 화폐 도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아름다운 돈은 이제 현지에서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2012년 2월이 되면 유통정지돼 화폐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늘 하늘을 날고 싶어했고 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조종간을 놓지 않았던 영원한 자유인 생텍쥐페리.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지갑에 담겨 전세계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으니 꿈을 이룬 게 아닐까.

백남주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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