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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 외손자’ 스테판 재키브 서울 공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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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재키브. 수필가이자 영문학자로 이름난 고(故) 피천득 선생(벽에 걸린 사진)의 외손자이자 유명한 물리학자 로먼 재키브(MIT 공대 교수)의 아들이다. [사진작가 박진호 제공]

3일 저녁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신선한’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이 연주됐다. 적당히 들뜬 현의 울림, 빠르게 흘러가는 속도감이 현대적인 해석을 전했다. 바이올린 협주곡의 단골 레퍼토리를 새로운 감각으로 재해석한 이는 스테판 재키브(24). 부천필하모닉과 함께한 ‘2009 교향악 축제’ 개막 연주는 청중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확신에 찬 음색, 자기 연주를 세심하게 들으며 이끌어나가는 능력 덕이었다.

재키브의 특별한 음악성은 앙코르 곡에서 다시 확인됐다. 바흐의 프렐류드 E 장조를 선택한 그는 빠르고 신경질적인 활놀림으로 세련된 소리를 만들어냈다. 스포츠카 광고에 어울릴 법한 바로크 음악이었다.

수필가이자 영문학자로 이름난 고(故) 피천득(1910~2007) 선생의 외손자, 하버드 졸업생(음악학·심리학), ‘클래식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는 실내악팀 ‘디토’의 멤버 등이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재키브를 설명했던 단어들이다. 이날 연주는 그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심는 계기였다.

◆“나는 행운아”=“나는 운이 좋을 뿐.” 연주 전 만난 재키브는 인터뷰 내내 ‘행운’을 강조했다. 4세에 생일 선물로 받은 바이올린에 흥미를 느끼게 된 것도, 미국 보스턴에서 좋은 스승인 지나이다 길렐스를 만나게 된 것도 모두 좋은 운 덕이었다는 말이다. 12세에는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데뷔한 후 필라델피아·피츠버그·신시내티 등 미국 유수의 오케스트라가 2009~2010년 시즌의 협연자로 지목한 경력도 모두 행운이라고 했다.

하지만 3일 무대에서 확인한 것은 세계 무대가 주목할만한 실력이었다. 한 눈에 보이는 뛰어난 집중력, 무대 위 긴장감을 즐기는 모습이 독특했다. “12살 데뷔 연주가 끝난 뒤 무대에서 내려오기 싫었다”는 그의 기억이 이해되는 장면이다. “내가 생각하는 음악을 많은 사람에게 들려주는 것은 신나는 경험이었다. 긴장감까지도 즐거웠다.” 즐기는 연주가 잘하는 연주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3일 밤 청중이 보인 뜨거운 반응이 입증했다.

◆외할아버지와 나눈 음악 공감=이날 무대는 재키브의 두번째 내한 협연이었다. 2006년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함께 한 첫 연주장에는 그의 외할아버지인 피천득 선생이 와있었다. “외할아버지가 본 처음이자 마지막 내 연주”라고 설명한 그는 “문학과 음악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를 나눴던 그가 그립다”고 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조피 무터와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의 팬이었던 피천득 선생은 재키브가 전문 연주자의 꿈을 품기 전부터 음악을 들려주고 이야기를 나눴다. 재키브의 어머니 피서영(보스턴대학 물리학과 교수)씨는 여름 방학마다 그를 서울에 보내 외할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도록 했다. 재키브는 “외할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어야하는 ‘문자 중독자’가 됐다”며 농담을 섞어 자신의 취미를 설명했다. “연주자가 아니라면 소설가가 됐을 것”이라고 할 정도다.

1년에 40~50회의 공연을 여는 그는 비행기에서 보내는 긴 시간 동안 문학 작품을 읽는다. 요즘은 독일 소설가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를 탐독 중이다. 스트라빈스키·베르크 등 새로운 작곡가의 작품을 공부하고 있는 재키브는 실내악단 ‘디토’와 함께 6월 내한한 후 12월 첫 음반, 독주회로 한국 팬과 다시 만난다. 

김호정 기자

◆앙상블 ‘디토(Ditto)’=한국계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31)이 중심이 돼 결성된 실내악단.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재키브(24), 첼리스트 패트릭 지(31), 피아니스트 지용(18) 등이 멤버다. 2008년 상반기 예술의전당, 성남아트센터의 티켓 판매율 1위를 차지하는 등 팬을 이끌고 다니는 인기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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