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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석 칼럼] 네 남자의 사랑과 결혼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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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작곡가 슈베르트의 예술 가곡이 좋다고 하지만, 시적 함축과 여운은 슈만이 한 수 위다. 내 경우 슈만 부인 클라라의 노래도 즐겨 듣는다. 대단한 재능이 분명한데, 어쩌면 작곡 스타일까지 남편과 닮았는지! 둘은 전혀 구분 안 될 정도이니 예술사의 명 커플다울까? 사실 슈만은 몸을 던졌다. ‘결혼 반대’를 외치는 장인과 법정 싸움까지 벌여 딸을 빼앗다시피 했으니 슈만·클라라는 19세기 낭만 결혼의 꽃이라 할만하다.

지난 주 리뷰했던 스테파니 쿤츠의 『진화하는 결혼』을 읽은 뒤 조사에 착수했다. 슈만을 포함한 몇몇 역사상 커플의 켯속을 따져봤다. 『진화하는 결혼』은 말한다. 역사 이래 모든 결혼은 정략결혼·중매결혼이었는데, 19세기 이후 낭만 결혼이 발명됐다고…. 그건 저네들 얘기고, 동양은 여전히 중매결혼의 천국이었다. 20세기 초까지도 그랬고, 숱한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책에 공표된 얘기라서 밝히자면, 함석헌·황덕순 부부가 그랬다.

함석헌이 평양고보 시절 중매결혼을 하고 보니 아내는 막상 글을 배운 적이 없었단다. 문맹의 아내와, 훗날의 명문장가와의 결합…. 비극이었다. 서로의 처지가 딱해 신혼 잠자리를 눈물로 보냈다는, 제자인 고려대 명예교수 김용준의 증언(『내가 본 함석헌』)은 마음 짠하다. 함석헌이 그런 아내와 평생을 함께 했다면, 정치인 박정희의 태도는 달랐다.

그도 대구사범 시절 김호남과 억지결혼을 했다. 선산 처녀는 키도 훤칠하고 예뻤다지만 박정희에게는 ‘없는 여자’나 마찬가지였다. 잠자리도 거의 하지 않고 겉돌기만 했다. 왜 그랬을까? 개인적 호불호 같은 게 아니다. 조혼(早婚)이라는 봉건·전근대의 인습에 대한 전면 거부다. 행운은 전쟁통인 1950년 여름 피란지 부산에서 수호천사 육영수와의 만남이었다. 남로당 전력 등 개인사의 상처를 모두 씻어낸 게 바로 그때였다.

중국의 마오쩌둥도 꼭 그런 경우다. 열네 살 때 뤄씨 성 처녀와 중매결혼했던 그는 완전 절망했다. “그녀는 내 아내가 아니었다구!”라며 훗날 에드가 스노 앞에서 펄펄 뛰었다. 장융의 평전 『마오』에 보이는 그 이야기는 젊은 마오가 봉건 중국을 얼마나 못 견뎌 했고, 혁명으로 뒤엎으려 했는지도 드러난다. 중매결혼은 간접살인이라는 게 그의 불 같은 소신이다.

사실 함석헌·박정희·마오의 앞 세대들은 중매결혼으로 수천 년을 살아왔다. 시대가 바뀌어 서양 발(發) 낭만결혼의 바람이 동북아로 건너오자 모든 게 바뀌었다. 몇몇 반항아는 그걸 봉건 인습으로 규정했고, 혁명의 깃발을 들기도 했다. 그 점에서 사랑과 결혼은 개인사이지만 한국·중국의 거물들의 삶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흥미진진한 블랙박스다. 그걸 새삼 재발견하게 해준 『진화하는 결혼』, 최근 만난 책 중 그 중 도발적이었다.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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