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 칼럼]후보들은 왜 말이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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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요즘 사람들은 마음 붙일 데가 없다.

자고 나면 외환위기다, 금융불안이다 하여 가슴이 덜컥덜컥 내려앉는 소식 뿐이다.

태국과 인도네시아에 이어 다음은 한국이다, 백악관이 한국 위기를 주시하고 있다…이런 소리가 어제도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이러다가 '국가부도사태' 가 나는건 아닌가 하는 걱정과 공포가 온 나라에 팽배하고 있다.

지하철은 사흘이 멀다 하고 사고가 난다.

도대체 이 나라에 정부가 있나 없나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감원 (減員) 과 취업난에 짓눌려 목매고 투신하는 사람에 관한 보도가 잇따른다.

며칠전 미국 비즈니스 위크가 한국경제를 빗대어 태극기에서 태극이 떨어져 나가고 만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경회루가 물속에 처박히는 그림을 실었다는 보도를 보고 침통해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자, 이 나라가 어디로 갈 것인가.

외국 언론이 보는 것처럼 국가부도로 가는가, 용케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선진대열을 향해 달릴 것인가.

누군가가 이 물음에 대답을 해야 한다.

국민은 지금 목이 빠지게 이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대답할 사람이 누군가.

물론 정부다.

그리고 대선후보들이다.

그들 역시 대답할 위치에 있고 대답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정부와 후보 그 누구도 대답을 내지 않고 있다.

임기 석달여를 남겨두고 힘 빠지고 신용 떨어진 정부가 우왕좌왕하고 무기력한 것은 그렇다 치자. 그러나 나름대로 자신만만하고 집권하면 곧 태평성대를 만들 것처럼 말하는 후보들은 왜 이런 위기상황에서 아무 말도 없는가.

어떤 후보는 집권하면 나라를 세계 5강 (强)에 올려놓겠다고 하고, 어떤 후보는 새로운 일자리를 3백만개 만들어 내겠다고 한다.

모두들 구조조정과 금융개혁과 벤처기업과 중소기업 육성을 말한다.

모조리 귀에 달고 입에 쏙 맞는 소리다.

그러나 그런 좋은 정책을 왜 꼭 집권후에라야 실현하려고 하는가.

그런 정책을 추진할 묘안이 있으면 당장 이 급박한 상황에 보따리를 풀어 경제도 살리고 자살도 방지한다면 국민의 박수를 한몸에 받지 않겠는가.

얼마전 월 스트리트 저널은 "후보 누구도 경제에 관한 명확한 정책제시가 없다.

금융개혁 의지에 대한 다짐과 곤경에 처한 기업을 지원하려는 인기성 약속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고 꼬집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도 한국의 대선후보들이 현안을 회피하고 있다면서 "후보들의 마음 가운데 위기상황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고 쓰고 있다.

경제규모 세계 11위라는 한국의 대선후보들이 오늘과 같은 경제위기를 맞아 정책제시를 못하고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는 이런 보도는 후보들에 대한 경멸이요 조롱 아닌가.

실제 지난 국회를 보면 후보들이 얼마나 준비가 없고 문제를 회피하는지 역력히 드러났다.

정부가 금융개혁법안을 통과시켜 줘야 대책을 낼 수 있다고 독촉했지만 어느 정당도 확실한 의지와 주견 (主見) 과 책임감을 갖고 법안 심의에 임하지 못했다.

마지막 날까지 "강행처리는 않겠다" "무리한 반대는 않겠다" 는 어정쩡하고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다.

금융개혁을 어떻게 해야 위기를 극복할지, 또는 현상황에서 절실히 필요한 금융개혁방안은 무엇인지에 대해 각 정당은 아는 것도 준비한 것도 없었던 것이 확실하다.

실제 자기네의 수준은 고작 그런 정도에 있으면서도 입으로만 장밋빛 공약을 해온 셈이다.

사람들은 지금 누구한테서라도 귀를 기울일 말이나마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해줄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진 사람이 누구겠는가.

게다가 지금은 선거철이다.

본래의 자기 이상으로 크고 해박하고 사려깊게 보여야 할 때다.

그런데도 온 국민이 해답을 기다리는 문제를 회피하고 어물쩍 넘어가서야 되겠는가.

지지율도 급하고 세 (勢) 확대도 중요하지만 가만히 있는 예비역 장성들을 서로 경쟁적으로 들쑤시고 지역감정의 골을 깊게 하는 저차원의 선거운동이 아니라 나라가 직면한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고 씨름하는 선거운동이 나와야 한다.

비록 국민의 심금을 울리지는 못하더라도 국민의 고통과 불안을 직시하고 동참하면서 사람들이 귀를 기울일 말이라도 해주는 후보가 나와야 한다.

그리고 꼭 그런 후보를 당선시켜야 한다.

송진혁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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