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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S한국경제]4.감원이냐 감봉이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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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공부 잘하는 고3년생인 아들이 '아버지, 실직당해 돈이 없는데 일류대학 안가고 등록금 안드는 사관학교나 장학금 탈 수 있는 지방대에 가겠습니다' 라고 해 아들을 붙들고 울었습니다.

" 14일 서울 봉천동의 재취업 중개기관인 서울인력은행에서 만난 조천식 (趙天植.45) 씨. 그는 올 1월까지만 해도 내로라하는 대기업 H사에서 관리직 차장을 지낸 전형적인 샐러리맨이었으나 명예퇴직으로 물러났다.

趙씨는 퇴직 직후만 해도 자신의 경력으로 볼 때 중견.중소기업에 쉽게 재취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으나 문을 두드리는 곳마다 10여차례나 퇴짜를 맞았다.

요즘엔 허탈감으로 불면증까지 얻었다고 한다.

불황의 영향으로 올들어 9월까지 정리해고당한 근로자만도 1만1백97명 (노동부 집계) . 지난해까지만 해도 명예퇴직이 큰 사회문제가 됐었으나 올들어서는 "명퇴만 해도 다행" 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것이다.

대표적 블루칩 (우량) 기업인 현대자동차도 최근 전체 임원 30%와 3년간 직원 13%를 감축키로 하는등 고용조정의 충격파는 부실.우량기업의 경계선이 없다.

과연 기업들이 인건비 증가를 얼마나 부담스럽게 느끼길래 이 정도인 것일까. 25인치 컬러TV의 제품 원가를 한번 따져보자. 한국제품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7.7%로 동남아산 일본 제품 (3.8%)에 비해 2배수준 (통산부 자료) . 자동차도 종업원 1인당 자동차 생산대수 (95년 기준) 는 한국이 22.96대로 일본 (37.91대) 보다 떨어지지만 91~94년 연평균 인건비 증가율은 한국이 19%로 일본 (12.6%) 보다 훨씬 높다.

올 노사협상에서 근로자는 임금인상을 자제하고, 경영자는 고용안정을 연계하는 맞바꾸기식 교섭이 두드러진 것 (9백개사가 임금동결) 도 노사가 모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가면 월급과 직급은 오르는 것이라는 30여년의 관념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는 시점에 있다.

기업들의 고용조정은 곧바로 실업자의 양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1주일에 1시간 이상 일한 사람은 다 취업자로 간주하는 우리나라 통계방식에 따른 올 3분기 실업률은 2.2%. 그러나 최근의 상황을 보면 거품을 거둘 경우 실제 실업률이 11%를 훨씬 넘는다는 견해 (부즈 앨런 앤드 해밀턴 한국 보고서)가 실감나게 들린다.

감봉을 감수하고 많은 사람을 고용하는 유럽.일본식의 고용조정방식을 따르느냐, 감원을 통해 기업을 살린뒤 고용을 다시 늘리는 미국식 방식을 따르느냐의 고통스런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다.

정리해고가 자유로운 미국그러나 최근의 상황을 보면 거품을 거둘 경우 실제 실업률이 11%를 훨씬 넘는다는 견해 (부즈 앨런 앤드 해밀턴 한국 보고서)가 실감나게 들린다.

감봉을 감수하고 많은 사람을 고용하는 유럽.일본식의 고용조정방식을 따르느냐, 감원을 통해 기업을 살린뒤 고용을 다시 늘리는 미국식 방식을 따르느냐의 고통스런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다.

정리해고가 자유로운 미국의 경우 79~95년 사이 4천3백만명이 실직했지만 고용은 6%가 증가하는등 다운사이징과 신규고용이 동시에 일어났다.

반면 기존 고용인력 보호에 주력하는 유럽에서는 독일 폴크스바겐사의 경우 누적된 경영적자로 3만8천명을 감원해야 했으나 근로시간을 주 38.8시간에서 28.4시간으로 줄여 3만명의 감원에 해당하는 비용절감 효과를 거뒀다.

물론 근로자들의 월급봉투는 그만큼 줄었다.

국내 기업들은 일단 감봉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감봉은 인건비 절감효과도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사기저하등 부작용이 있어 감원보다 훨씬 나쁜 효과를 미칠 수 있다" (禹時彦 현대그룹 인재개발팀 이사) 는 주장이 우세하다.

앤더슨 컨설팅의 조지오 모이제 부사장은 "한국의 노조들도 이제는 (직업을 가진) 노조원들만 생각하지 말고 신규채용자.실직자등 전체 근로자를 고려해 해고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고개숙인 아버지' 뿐만 아니라 '고개숙인 아들과 딸' 도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사회보장제도가 부족하고 재취업도 어려운 우리 실정상 무턱대고 사람을 자르기보다 노동시간 단축.조업단축등을 통한 유럽식 고용조정 방식을 참고해야 한다.

" (尹于鉉 민주노총 정책부국장) "정리해고는 오히려 고용불안을 조성해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 (金鐘珏 한국노총 정책본부위원) 이에 따라 계약직.성과급 중심의 임금체계 확립 (노동연구원 康淳熙박사) , 전직훈련.고용알선 기관의 육성 (金榮培 경총 상무) , 근로자 파견제의 조속한 도입 (李熙範 통상산업부 산업정책국장) 등 대안도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실직은 오늘의 일이고 대책은 내일의 일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경총이 운영하는 고급인력 정보센터의 경우 지난해 7월 개설이래 10월말까지 3천5백49명이 취업을 의뢰했지만 취업자는 전체의 8.9%인 3백16명에 그쳤다.

결국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선 재취업의 길을 활성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고용조정과 실업문제는 더이상 '불황기의 일시적 경제현상' 이 아니라 심각한 경제.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홍병기.성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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