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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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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한바탕 수상한 잔치가 열린다. 먹고 마시는 건 덤이다. 주인이 곳간 속 재산을 펑펑 선물로 쏘는 게 메인 이벤트다. 친소도 따지지 않고 대가를 구하지도 않는다. 바라는 건 “참 대단한 분”이란 칭송뿐이다. 정신 나간 사람 다 있다 싶겠지만 북미 태평양 연안의 치누크 인디언 사회엔 19세기까지 실제로 이런 문화가 있었다. 무리에서 큰어른 대접을 받으려는 사람은 손님들을 불러 생선과 고기, 모피와 담요 등을 무한정 나눠줬다. 이 잔치를 ‘포틀래치(potlatch)’라 했다. 치누크 말로 선물이란 뜻이다. 재산을 물 쓰듯 베푸는 게 사회적 지위를 얻는 공식 통로 노릇을 한 것이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통 큰 씀씀이 행각은 흡사 포틀래치를 연상시킨다. 금고와 지갑에 꼭꼭 쟁여둔 현금·달러·상품권에다 양주며 운동화까지 무차별로 선사했다. 이쪽저쪽 가리지 않고 기대보다 듬뿍 안겨줬다. “아무 조건 없이 주는 것”이란 말로 받는 사람 부담도 덜어줬다. 덕분에 국회의원·도지사·검사들이 깍듯이 ‘회장님’으로 모셨다. 전임 대통령 형과는 ‘패밀리’로 통했다.

북미 인디언과의 차이라면 박 회장이 높은 신분만 챙긴 게 아니란 거다. 장사꾼답게 뿌린 만큼 거둬들였다. 지인들이 내부정보 흘려주고 외압 가해준 덕에 세종증권 주식, 휴켐스 거래로 대박을 터뜨렸다는 의혹이 대표적이다. 세무조사 무마, 딸의 정계 진출도 부탁했다 한다. ‘조건 없는 선물’이란 당장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무방하단 소리였나 보다. 언젠간 돌려받을 보험 드는 셈 쳤던 게다.

뇌물을 짐짓 선물인 척 꾸미는 건 동서고금이 매한가지다. 미국의 조지 W 부시 정권 때 공화당 하원의 전 원내대표, 백악관 고위관료 등을 날려버린 로비스트 잭 아브라모프의 스캔들도 그랬다. 고급 레스토랑 식사, VIP룸에서의 스포츠 관람, 스코틀랜드 골프여행 등이 미끼로 제공됐다. 호화판 선물의 숨은 전주는 카지노 사업 허가를 노린 인디언 부족들이었다. 미 의회가 뇌물이라 볼 수 없는 선물 기준을 50달러로 못박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은 선물 속에 영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하우(hau)’라 불린 이 영은 원래 주인에게 되돌아가려는 속성이 있어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을 이어준다 했다. 이렇듯 선물이 곧 관계인 줄 알기에 경계해 마지않았다. 일찍이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도 “거저 받은 선물만큼 비싼 것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네 고관대작들은 선물인 줄 알고 맘 편히 받아 쓰셨다니…. 그걸 변명이라고 하나, 아마추어같이.

신예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