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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스포츠를 모른다고? 당신 레드카드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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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스포츠는 ‘남자들 만의 세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여자들은 스포츠를 싫어한다’거나 ‘여자들은 스포츠의 기본적인 룰이나 진행 방식을 모른다’는 게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생각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모든 여성이 스포츠에 아무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여자 운동 선수가 아니더라도 스포츠로 ‘먹고 사는’ 여자들이 꽤 많다는 사실은 이제 놀랄 일도 아니다. 프로농구 SK 나이츠의 장내 아나운서 박수미씨처럼 남성의 성역을 파고든 여성들이 있다. 여자농구 전문 방송인 유영주씨처럼 아줌마 특유의 센스로 시청자를 사로잡는 여성도 있다. 방송을 켜면 KBS N스포츠의 김석류ㆍ송지선 씨 같은 스포츠 전문 방송인을 만나게 된다. 이번 주 중앙SUNDAY에서는 스포츠계를 점령해가는 우먼 파워, 그 주인공들을 만나본다.

프로농구가 벌어지는 경기장으로 가 보자. 코트 위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을 볼 새도 없이 무전기를 들고 경기장 곳곳을 뛰어다니는 여직원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들은 경기 중에 진행되는 각종 이벤트와 취재진 등을 챙기고 있는 구단 직원이다. 비교적 여직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홍보팀 외에도 마케팅 및 선수단 지원을 담당하는 여성들도 있다. 이들은 관중을 한 명이라도 더 끌어모으기 위해 치열하게 아이디어를 짜낸다.
프로농구 SK 나이츠는 여성 장내 아나운서를 쓰고 있다. 주로 남자가 했던 장내 방송에서 여자 목소리가 나오면 색다른 점도 있고, 여자 목소리로 설명해 주면 더 쉽고 재미있을 거란 생각에서 SK가 2008~2009 정규리그에 처음 시도했다.

프로야구 경기장에서는 중계팀이 경기 후 승리팀 감독과 수훈 선수를 불러 간단한 인터뷰를 한다. 이때 인터뷰를 진행하는 스포츠 전문 케이블채널의 여자 아나운서들은 야구 팬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축구에서는 여성 국제심판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지금은 심판 직에서 은퇴한 임은주 전 심판도 있었고, 2008 베이징 올림픽 여자축구 주심으로 활약했던 홍은아 심판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경기장에 모여 있는 취재진을 살펴봐도 여성이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보기 드물었던 여성 스포츠 기자는 이제 흔히 볼 수 있다.

여자라고 무시할 땐? 나도 그냥 무시

프로농구 LG 세이커스 마케팅팀의 유영순(40) 팀장은 프로농구 관련 일을 맡은 지 3시즌째다. 그는 1988년 LG전자에 입사해 영업직에서 뛰었던 베테랑이다. 그런 유 팀장은 2006년 우연히 농구단으로 옮길 기회가 생겼고, 이때 자원해 농구단 마케팅 일을 하게 됐다. 그렇다고 그가 농구에 문외한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유 팀장은 여자농구의 수퍼스타였던 유영주(38·전 국민은행 코치) 여자농구연맹(WKBL) 해설위원의 언니로, 초등학교 때 농구 선수로 활약했다.

유 팀장은 “영업직과 농구단 마케팅이 모두 그렇다. ‘아, 여긴 진짜 남자 세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 가장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여전히 여자가 비집고 들어가기 힘든 장벽이 있다는 고백이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창원 홈 팬들이 경기 시작 6시간 전부터 길게 줄 서 있는 걸 보고 눈물이 날 정도로 뿌듯했다. 우리가 홈 경기에서 벌이는 아기자기한 이벤트들은 어디에 내놓아도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다”면서 “여자라고 무시하는 사람도 종종 있지만, 그럴 땐 그냥 같이 무시해 버리는 게 나의 노하우”라고 웃었다. 유 팀장은 팀이 연패에 빠졌을 때 선수들에게 힘 내라는 뜻으로 라커 룸 벽에 드라마 ‘꽃보다 남자’ 패러디 포스터를 붙여 응원했다. 남자 주인공들의 얼굴에 LG 선수들 얼굴을 합성한 것이다. 이처럼 유 팀장은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마케팅과 선수단 지원을 두루 이끌고 있다.

여성스러운 게 오히려 경쟁력

방송에서는 특히 여성스러움을 최대한 살릴수록 더 인기다. 여름에는 프로야구, 겨울에는 프로배구 현장 리포터로 1년 내내 스포츠 현장에서 살고 있는 KBS N스포츠의 김석류(26)·송지선(28) 아나운서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미모 덕분에 야구 팬들에게 인기가 높은 데다 “이들이 현장에 나오면 응원하는 팀이 꼭 이긴다”면서 ‘여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들은 지난해 프로야구 히어로즈의 목동 홈 경기 때 시구와 시타자로 나서기도 했다.

김석류 아나운서는 최근 인터뷰에서 “스포츠 현장을 누비느라 지방 출장이 잦은데 힘들지 않으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런데 오히려 각 지방에서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먹는 즐거움이 더 크다”고 말했다. ‘여린 여성이 거칠고 힘든 스포츠 현장에서 일한다’는 시선으로 보지 말아 달라는 뜻이다.

스포츠 전문채널 대부분이 여성 아나운서에게 현장 인터뷰를 맡겨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든다. 김성근 SK 와이번스 감독은 “여자 아나운서들이 인터뷰를 하면 평소처럼 화난 듯한 표정을 하고 있기가 미안해 일부러라도 웃게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들 여자 아나운서는 대부분 스포츠 전문 캐스터가 돼 경기를 중계하는 게 꿈이다.

그런가 하면 ‘아줌마스러움’으로 인기를 얻은 주인공도 있다. WKBL 인터넷 방송에서 해설을 하고 있는 유영주 해설위원이다. 유 위원은 지고 있는 팀, 혹은 친한 후배를 편파적으로 응원하거나 시원한 감탄사를 내뱉는 등 솔직한 해설로 인기를 모았고, SBS스포츠의 ‘인사이드 WKBL’에도 고정 출연하고 있다. 쌍둥이 형제를 키우고 있는 유 위원은 방송인으로 자리 잡은 비결에 대해 “아줌마가 아줌마처럼 방송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며 웃는다.

스포츠는 나의 운명

특정 종목의 매니어였다가 아예 해당 종목을 ‘밥벌이’의 터전으로 삼게 된 경우도 있다. WKBL 인터넷 홈페이지 관리를 맡았던 김우리(30) 우리네닷컴 대표는 어릴 때부터 여자농구의 열혈 팬이었고, 대학 시절에는 전주원(신한은행)의 매니저를 한 경험도 있다. 그는 “WKBL 홈페이지 운영을 더 실속 있고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일을 시작했다”면서 “2002년 WKBL 홈페이지 관리를 시작했는데, 직접 아이디어를 내 전 경기를 현장에서 문자 중계했다. 당시에는 ‘별로 보는 사람도 없는데 왜 사서 고생하느냐’고 욕을 먹고, 경기장에서도 푸대접받기 일쑤였지만 나중에는 시청자가 1000여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고 말했다. 김씨는 2007년까지 WKBL 홈페이지 운영과 콘텐트 기획 등을 총괄 관리했고, 지금은 국민은행과 금호생명 여자농구단의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1998년부터 10년 넘도록 스포츠 전문 리포터를 거쳐 스포츠 전문 MC로 활약하고 있는 이은하(38)씨는 “처음부터 스포츠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고 밝혔다. 95년 MBC 공채 리포터로 입사한 이씨는 98년 선배의 공석을 대신하며 스포츠 리포터를 시작했다. 그는 “중학교 때 일기장을 봤더니 ‘88올림픽을 치르고 나면 우리나라는 스포츠 강국이 될 것이다. 그러면 스포츠 전문인력이 많이 필요할 텐데 나는 스포츠를 대중에게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써 놓았더라. 이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 ‘이은하의 아이러브스포츠’를 진행하고 있는 이씨는 스포츠 현장을 누비는 대표적인 베테랑 여성 직업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씨는 “스포츠와 사랑에 빠지는 것, 스포츠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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