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펴면 침실, 밥상 펴면 식당 우리네 건축은 무목적의 목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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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호 06면

일행이 경기도 양평의 개인주택 노헌(蘆軒·Reed House)을 방문했을 때다. 승효상씨가 설계한 이 집에는 방 한 칸짜리 별채가 있다. 한쪽만 벽이고 세 방향으로 커다란 여닫이 창호지문이 달려 있다. 문을 닫으면 아늑하고, 열면 사방이 훤히 통하는 느낌이다.

승효상의 건축철학

버그돌이 “명상을 위한 공간이냐”고 묻자 승씨는 “그렇다”고 답했다. 이를 듣지 못한 일행 중 누군가가 또 물었다. “화투 치는 방이구먼.” 승씨는 또 “그렇다”고 답했다. 아마 “낮잠 자는 방이구먼”, 혹은 “책 읽는 방이구먼”이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승씨는 “우리네 집은 본래 거실·침실 등 용도가 아니라 안방·건넌방 등 위치로 나뉘었다”고 말한다. “요를 펴면 자는 방, 밥상을 펴면 먹는 방, 책상을 펴면 공부하는 방”이라는 얘기다. 집이 작아서가 아니다. “99칸짜리 고관대작의 집도 그랬다”는 것이다. 마당도 마찬가지다. “제사도 지내고, 축제도 열 수 있는 공간”이라고 했다.

그는 이런 건축철학을 ‘무목적의 목적’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다목적’이 아니다. 건축가가 정해둔 목적을 건축을 쓰는 사람에게 강제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들렸다.

경기도 양평의 개인 주택 노헌. 바로 앞에 보이는 것이 방 한 칸짜리 별채다. 신동연 기자

‘무목적의 목적’과 더불어 그의 건축을 이해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터무니’다. 흔히 정당한 근거가 없는 말과 행동을 두고 ‘터무니없다’고 할 때 쓰는 바로 그 말이다. “본래 ‘터에 새겨진 무늬’라는 말이죠. 우리 선조는 일찍부터 사는 방법이 터, 즉 장소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건축은 터에 새겨진 삶을 밝혀내고 거기에 새로운 무늬, 새로운 삶의 형태를 어떻게 덧댈까 고민하는 작업입니다.” 그는 터무니를 한자로는 지문(地紋)으로 옮기고, 다시 무늬 문(紋)자를 글월 문(文)자로 옮긴다. 지문(地文), 즉 땅의 기록이라는 의미다. 영어로는 랜드스크립트(landscript)다.

자연히 그가 건축에서 지향하는 바도 땅의 의미를 되살리는 작업이다. “세상의 땅은 제가끔 다 다르죠. 위도와 경도만이 아니라 자연환경과 그 땅에 쌓여 있는 기억이 다 다릅니다. 흔히 집은 평지에 서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지요. 그래서 계곡이든 비탈이든 평지로 만들고 축대를 쌓곤 합니다. 하지만 평지는 평지대로, 비탈은 비탈대로 이야기하는 말이 있습니다. 건축가는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땅이 가진 원래의 성질이 훼손돼 있다면 그걸 건축을 통해 복구하려고 합니다.” 외국에서의 작업도 마찬가지다. “중국 만리장성 부근에 호텔 건물 15채를 지을 때도 원래 농가들이 배치돼 있던 모습을 그대로 따랐죠. 베이징 천안문 광장 앞쪽의 첸먼(前門)지역 재개발 설계는 더더구나 그랬죠. 베이징은 터의 무늬가 아주 많은 도시니까요.”

그는 “장소가 건축을 만든다”고 강조했다. “교회로 지은 건물이 나중에 디스코텍으로 쓰일 수도 있죠. 건축을 결정하는 건 그게 아닙니다. 건축의 비밀은 장소에 실마리가 있습니다. 땅은 어떤 건축이 되고 싶어 하는지 요구합니다. 그게 뭔지를 잘 들은 다음에 건축을 한다면, 적어도 잘못된 건축은 되지 않는다고 봐요.”

그는 “좋은 건축이 좋은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환경결정론이 아니에요. 사는 사람의 의지에 건축을 맡긴다는 점에서 윤리결정론이라고 할까요.” 앞서 그가 들려준 ‘무목적의 목적’과 통하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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