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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석 칼럼] 김점선, 우리의 ‘문화영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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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지난 주 타계한 김점선은 한국의 플럭서스다. 비유가 아니라 미술사의 족보가 그렇다. 사람들은 “머리에 깃털만 꽂으면 인디언 추장 같다”는 둥 겉모습만을 기억하지만 그는 정찬승·정강자와 함께 아방가르드 1세대로 분류된다. 백남준·이우환이 심사했던 앙데팡당전 공모에 뽑힌 게 72년인데, 그 전에 관 궤짝을 들고 졸업식장에 입장하는 멋진 퍼포먼스로 이미 떴다.

그건 예술의 확장이자, 게릴라 예술 같은 게 아니었을까? 미술이 어디 따로 있나? 보이스·백남준·김점선 등 범(汎) 플럭서스 패거리는 삶 자체를 예술로 보는 게 아닐까? 인생살이 사사건건 모든 게 예술이라는 선언이자, 화끈한 통념 뒤집기다. 당시 갓 20대 나이의 김점선은 그때 벌써 ‘전문가 바보’ 사이에 무한반복되는 화석화된 미술과 굿바이한 것이다.

그게 현대미술의 포인트다. 그걸 오장육부로 받아들여야 1세기 전 오줌통을 뜯어다 전시장에 올려놓았던 마르셀 뒤샹의 유쾌한 장난이 보이고, 새까만 후배 김점선의 미친 짓도 잘 보인다. 그녀가 자기 글쓰기를 ‘성인용’이라고 선언했던 이유도 파악된다. 그녀 책 중 하나가『나는 성인용이야』가 아니던가! 즉 ‘삶과 언어의 이종격투기 선수’인 김점선은 유치찬란한 고정관념을 훌쩍 날려버린 경지, 즉 진짜 자유를 목말라했다.

“나는 지금 막 태어난 아이다. 아무 기억도 없다. 나는 완전 무식이다. 나는 완전히 혼자다. 나는 과거가 없다. 역사도 없다.”(『나는 성인용이야』99쪽)

멋지다. 김점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사자후인데, 천진난만하면서도 용감한 이런 문장이야말로 우리말 글쓰기의 보석이다. 『10cm 예술』『점선뎐』등에 툭툭 튀어나오는 스타카토의 짧은 문장은 지루한 삶에 짜릿한 양념이자, 새로운 산문의 모델이다. 암 투병의 와중에도 그는 “암덩이는 내 몸에서 돋아난 종유석이어서 그조차도 나는 사랑한다”고 털어놓지 않았던가?

지난 주 리뷰했던 책 『사람을 그리다』에서 언론인이자 학자인 최정호는 멋진 말을 했다. “한국은 인재는 많아도 인물을 못 키운다”고. 그 말이 맞다. 김점선, 인재 맞다. 82년 미국에 간 뒤 쓸쓸하게 죽었고, 뉴욕의 화가 이상남이 환기시켜 줄뿐인 정찬승도 인재 맞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들을 너무 금세 잊고 만다. 제대로 자리매김도 못해주니 그게 영 쓸쓸하다. WBC의 야구 영웅말고, 늠름한 문화 영웅들도 꽤 있는데도 말이다.

조우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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