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비영리 펀드로 가난과 맞선 새 시대 ‘로빈 후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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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블루스웨터
재클린 노보그라츠 지음, 김훈 옮김
이른아침, 608쪽, 1만6000원

이 책에서 참 자주 만나는 표현은 ‘배웠다’다. 투자은행에서 일하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며 25살이던 1987년 아프리카에 발을 디딘 저자는 보기 좋게 엎어져 코가 깨진다. 그리고 깨닫는다. 아프리카를 구하려면 자신을 잘 알아야 하고, 목표를 분명히 자각해야 하며, 내 방식이 아닌 아프리카 방식으로 대해야 함을. 그래서 겸손하게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음으로 들으며 깊이 공감하는 법을 배운다.

저자는 2001년 세계 최초로 비영리 벤처캐피털 ‘어큐먼펀드’를 설립한 재클린 노보그라츠. 책은 나라님도 구제 못 한다는 가난에 새로운 방식으로 맞선 그의 좌충우돌기다.

고기를 잡아 주는 것이 아닌 잡는 법을 가르치려는 그의 첫 사업은 르완다에 설립한 아프리카 최초의 빈민은행 ‘두테림베레’다. 빵을 팔아 돈을 버는 ‘블루 베이커리’로 자활 모델도 제시한다. 지은이는 “가난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기부금보다 기회”라 고 말한다. 그는 가난의 해결책을 어설픈 감상이 아닌 시장과 자선 활동 사이에서 찾는다. 기부금을 모아 ‘사회적 기업’에 투자하는 ‘어큐먼펀드’를 설립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펀드의 성격은 사회적 기업이 수익률 하락 등에 휘청거려도 안정적으로 사업을 펼치도록 돕는 ‘끈기 있는 자본’이다. 덕분에 40개 기업에 4000만 달러를 투자해 2만3000여 개의 일자리를 만들고, 굶주림·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구해냈다.

지은이는 오래 전 자신이 입다가 구호단체에 보낸 ‘블루스웨터’를 입은 한 소년을 르완다에서 만난 뒤 “우리는 모두 연결된 존재”라는 믿음을 갖는다. 때문에 그녀는 르완다 대학살 당시 누군가가 준 4ℓ의 우유로 목숨을 건진 뒤 빈민은행의 도움으로 자수성가한 여성을 바라보며 이렇게 썼다.

“나는 생기 가득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인간으로서의 내 존엄함은 바로 그녀의 존엄함에 달려 있고, 그녀의 존엄함 역시 내 그것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이역 만 리의 가난한 이를 보듬는 이유다.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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