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남북관계의 주도권 회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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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현 정부는 지난 수년간, 특히 94년 10월 제네바 합의 이후 대북한 (對北韓) 정책에서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한채 임기만료를 앞두고 있다.

정부가 96년 4월 제기한 4자회담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으며, 한반도 문제를 미국의 판단에 의존하고, 미.북, 일.북 관계개선 과정에서 남한이 소외되는 느낌조차 받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대북정책 난맥상의 주된 원인은 미국이나 북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먼저 한국은 대북정책의 일관성과 장기적 대안이 결여된 상태에서 김일성 (金日成) 사후에 대비한 성숙된 대북정책을 수립하는 데 실패했다.

김일성의 사망은 예견됐던 일이기에 사망 전에 이미 장기적인 안목에 기초한 대북정책을 수립하고 정치권의 합의를 결집하면서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체계적으로 이끌어 갔어야 했다.

그러나 정책 부재 (不在) 의 상태에서 '조문논쟁' 에 휩싸여 남북관계를 급속하게 냉각시켜버리고, 주도권을 상실한 채 미.북 핵협상에서 관망자의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현 정부는 독일의 '2+4회담' 에 의한 통일을 한반도 통일 모델로 삼아 현재 미.중.남북한을 묶는 4자회담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서독에 의한 흡수통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전제는 바로 동독이 서독과 합칠 의사를 강하게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반면 북한의 경우에는 남한을 보는 관점이 매우 부정적이다.

북한 엘리트중 일부는 남한이 정치.사회적으로 혼란스럽고 느슨한 사회며, 미국만 물러난다면 전쟁을 통해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다른 부류는 남한이 펼치는 대북정책이 매우 공격적이라 느끼며, 흡수통일의 경우 자신들의 생명과 지위에 대한 강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의 남한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시각이 미국을 보다 우호적인 세력으로 인식하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에 4자회담은 통일정책이라기보다 체제유지를 위한 책략으로 봐야 한다.

현 정권의 임기가 종료되는 내년 2월까지 북한이 4자회담을 포함한 남북문제에 있어 전향적 자세를 보이리라는 예상은 하기 힘들다.

남한의 정치과정을 잘 파악하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현 정권이 아니라 차기 정권에 '선물' 을 주면서 남북관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차기 정부 출범 후 김정일 (金正日) 과 북한 정권은 아직 새 정부가 자리잡기 전이라는 우리 사정을 이용해 남북관계에 있어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시도할 것이 분명하다.

현 대선정국은 과거와 달리 매우 유동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대북정책은 어떤 정당이 집권하느냐를 떠나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전개돼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청와대.여당.야당, 그리고 대북관련 부처들은 북한이 제기할 대내외적인 공세에 대처하고 우리의 통일목표에 접근하기 위해 초당적 자세로 협력해 대북정책에 대한 정치권 상층의 정책적 합의를 도출하고, 정권 출범이후 벌어질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시대 전개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책무를 지니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대북정책을 뒷받침할 명확한 목표수립과 정책수단의 선택이 필요하다.

독일 통일의 핵심 전제가 동독인들의 우호적 대서독관이었다는 점을 명심하고 북한동포의 인식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체계적이고 주도적인 대북 지원전략이 수립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장기적인 경제문제를 미국이나 일본을 통해 해결하는 것보다 남한과의 경제협력이 더 유리하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이를 통해 북한정권이 구조적으로 남한의 경제에 연계, 의존하는 경험을 축적하게 해야 한다. 이와함께 황장엽 (黃長燁) 비서 망명과 이두익 (李斗益) 차수의 망명설을 포함한 일련의 상황을 살펴볼 때 북한의 갑작스러운 내부 변화에도 충분히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국방력을 재점검하고 약화된 국내 경제 기반강화에 우선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통일이후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빠른 시간내에 극복해야만 하는 우리로서는 통일에 있어 필수적인 경제력 확보와 통일 후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보다 건전한 사회.경제 질서를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 정치.경제.사회의 구조적 병폐 극복이 미래지향적인 통일정책 수립에 전제조건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준비 없이는 대북정책에 있어 주도권을 확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노경수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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